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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8호> 스쿨미투, 여학생을 위한 사회는 없었다_편집위원 성해

by yonseiji 2025. 12. 23.

 

 

터질 게 터졌다?[각주:1]

2018년은 ‘미투’(#MeToo) [각주:2] 의 해였다. 그리고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미투의 전장은 학교다. 올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의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시작되었던 미투 운동은 피해가 폭로되지 않은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폭로가 이어져 나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스쿨미투는 전교조 여성위원회가 올해 3월, 교내 성폭력 사례를 익명으로 제보하는 동명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울 노원구 용화여고의 경우, 올해 3월에 해당 학교 졸업생들이 재학생들에게 피해 경험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하였고 가해 교사의 징계를 끌어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사례가 유의미한 결과를 끌어내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긴 했지만, 스쿨미투는 그 뜨거웠던 관심도가 점차 식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9월 초에 충북여중 학생이 트위터에서 다시 한번 교내 성폭력을 폭로하며 전국 곳곳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비슷한 경험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스쿨미투는 재점화 되었다. 익명의 재학생이 재학 중인 학교의 스쿨미투 계정을 만들고 해시태그로 교내 성폭력 공론화를 시도하는 등 기존의 미투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쿨미투 만큼 ‘터질 게 터졌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폭로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학생으로 10대를 보낸 여성이라면 모두가 겪어야만 했던 것이 이제야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복을 입는 순간부터 갑자기 사회는 복장과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평가하기 시작한다. 외모나 몸매에 대한 평가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내가 다닌 여고 옆에는 또 하나의 여고와 남고가 한 거리에 나란히 있었는데 교사들은 옆의 여고와 우리 학교를 외적으로 항상 비교했다. 옆의 여고 학생과의 단순한 외모 비교에서 그쳤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꼭 남고의 선호도를 비교의 기준으로 끼워 넣던 것은 가장 악질이었다. ‘옆 여고의 축제에는 남고 학생들이 많이 가고 우리 학교는 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아주 익숙한 여성혐오의 논리를 펼쳤다.

외모 비교는 대학 진학이나 입시 등 진로에 대한 문제와 결부되어 한층 더 악질적으로 진화한다. 여성의 외모와 능력의 상관관계를 상상하는 여성혐오의 논리는 학생의 외모와 성적에도 적용되었다. 그 상상의 결론은 ‘학생은 예쁜 것보다는 공부를 잘하고 대학을 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여학생의 외모와 성적을 반비례 관계로 보는 것도 어이가 없는 논리인데 이러한 외모 평가에 갑자기 입시가 개입되면 ‘예쁘고 꾸미는 여성’에 대한 멸시로 이어진다. 여성혐오는 일상적으로 오가는 말뿐 아니라 시선에서도 녹아들어 있었다. 학생을 성적 대상으로 보았던 남교사의 시선이 기억에 남아있는데 최근 들어서야 그 시선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 깨닫기도 했다. 당시의 내가 둔감했기 때문에 그 미묘한 불쾌함을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일상적 여성혐오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3년을 보낸 나는 스쿨미투로 폭로된 피해 경험의 스펙트럼에 압도된 것은 사실이지만 폭로된 피해 내용 자체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만큼 학교는 인권 침해, 성차별, 성폭력 등이 만연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쿨미투의 등장이 충격적인 건 문제 제기를 결심한 그들의 용기 때문이었다. 10대 학생들에게 학교는 곧 자신이 마주한 세계의 전부와도 같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인문계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가 절대 기준이다. 한국에서의 고등학교는 생활기록부와 같은 대학 입시와 직결되는 학생 개개인의 평가가 교사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쉽사리 폭로될 수 없는 장소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 개개인의 폭로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문제 제기는 그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학생’이기에 겪어야 했던 것들 - 여학생을 향한 시선과 학교에서의 여성혐오

‘학생답게’ 행동하라는 요구가 드러나 있는 교칙은 보호라는 명목으로 학생을 한 명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통제되어야 할 미성숙한 존재로 상정한다. 외모와 복장에 대한 규제, 휴대전화 사용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칙을 바탕으로 학교는 학생의 사적인 영역까지 인권 침해를 해 왔다. 머리 길이나 단정한 교복 매무새 등을 과도하게 검사하는 행위는 등·하교 길에서,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권 침해 사례 중 하나다. 학생 인권 조례가 2010년에 와서야 몇몇 지역에 공포되었지만, 아직도 ‘학생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단정하면 좋지 않으냐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정함이 누구를 위한 단정함인가? 이는 결국 교복 입은 학생을 바라보는 비-청소년의 관점에서 요구하는 단정함일 뿐이다.

‘학생다움’이 말하는 단정한 교복 차림에 대한 사사로운 규제들은 학생의 편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규제들이다. 이는 교복 치마를 의무적으로 입어야 하는 학생들의 불만 토로에도 여전히 교복 치마를 고수하는 학교가 많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교복 치마의 길이에 집착하고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마저 금지하는 행위는 학생의 편의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체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복장 규정이다.

하지만 이번 스쿨미투로 폭로된, 여학생들이 겪어온 통제는 단순히 학생 인권의 문제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학생 인권의 문제에 여성혐오적 시선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어느 학교는 교훈에 ‘고운 몸매’라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번 스쿨미투의 흐름에 맞춰 교훈을 개정했다. 이 사례처럼 여학생에게 요구되는 ‘바람직한 학생 상’은 유독 외모와 신체에 초점이 맞춰 있다.

이는 비단 학교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사회적으로 여학생의 외모와 신체를 향한 이러한 시선은 만연해 있다. 여학생에게 요구되는 단정한 외모와 신체는 곧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로 이들을 대상화하려는 성인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이때의 단정함은 보편적인 단정함의 정의, 단순히 깔끔하고 깨끗한 옷차림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학생은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에 알맞은 단정함을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단정한 교복 차림은 기본이고 염색하지 않은 머리,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 등 말이다. 단정함의 기준이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단정하지 않은 학생을 향한 비난은 단순히 학생다움의 기준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여성혐오적인 시선 안에서 이루어진다. 순수한 소녀에 대한 숭배를 통해 여학생이 단정하고 수동적인 이미지에 순응하게 하면서 동시에 단정하지 않은 여학생을 혐오하는 시선을 내재하게 한다. 오랜 역사의 성녀-창녀의 이분법적인 여성혐오 논리 [각주:3] 는 학생다움이라는 명분과 함께 학교에서도 유효한 논리로 설득력을 가져왔다.

이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교복을 입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문제 또한 지적할 수 있다. 여자 아이돌의 교복 컨셉과 같이 미디어에서 성적 대상화된 교복의 이미지를 허용하는 것은 실제로 교복을 입는 10대 청소년 여성을 성애화한다. 실제로 스쿨룩을 빙자한, 몸매가 부각된 교복 의상뿐만 아니라 하네스 [각주:4] , 가터벨트 등의 소품과 함께 사용되는 여자 아이돌의 교복 컨셉은 이 나라가 순수한 소녀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발칙한 여학생’의 이미지에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10대 여성 청소년에게는 학생다운 순수한 소녀이기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사회에서는 교복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은근히 부추기고 있는 환멸의 실태가 반복되고 있다.

교과서나 성교육 영상 시청 등을 통해 시대에 맞지 않는 성차별적인 관점을 주입하는 것도 문제다. 전교조 여성위원회 소속 중등 성 평등 연구 소모임은 2018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여전히 성차별적인 요소가 가득했음을 지적했다. [각주:5] 사회 교과서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따른 성 역할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과학, 수학 교과서에서는 과학자와 수학자가 대부분 남성만으로 묘사되는 문제를 제기했다. 교과서의 성차별적인 요소에 대한 지적과 함께 교사의 성 평등 교육과 페미니즘 교육을 시행해야 할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적할 만한 것들이 참 많았다. 그때 당시의 내가 페미니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은 평생 내 머릿속에 남아서 자연스럽게 내 삶에 박혀 들어가 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여성혐오의 논리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오랜 시간 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성차별적인 영상 시청에 시간을 소모하고 성차별적인 관점으로 가득한 교과서로 학습하며 성 역할 고정관념을 내재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학교가 성차별 등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겠다고 시행해왔던 것은 양성평등 글짓기 정도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 의무적으로 시행하기만 하는 이러한 활동도 문제가 있다. 매년 반복해서 실시된 양성평등 글짓기는 학생들에게 어떠한 맥락이나 정확한 페미니즘 교육 없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과도 없을뿐더러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도 고민 없이 쓰였다. 실제로 나의 경우에는 양성평등 글짓기의 필요성에 의문을 던졌던 기억이 난다. ‘이 시대에 무슨 성차별이 있다고. 남아선호사상도 다 옛말이더라.’라고 부끄럽게도 썼었다.

트위터를 선택한 스쿨미투 - 학교의 폐쇄적인 구조

교사의 성 평등 교육과 의무적인 페미니즘 교육처럼 학교 내부적으로 지금의 사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스쿨미투로 폭로된 교내 성폭력 문제가 오랜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게 만든 구조적 문제를 봐야 한다. 한국에서의 학교라는 공간은 폐쇄적인 구조와 이로 인한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곳이다. 이러한 학교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는 학생들이 스쿨미투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9월 이후의 스쿨미투는 트위터를 통해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미투와는 구분된다. 올해 초의 미투 운동과 용화여고의 사례가 직접 언론에 나서는 양상을 보였던 것과 달리 최근의 스쿨미투는 트위터의 익명성에 기대어 폭로가 진행되었다. 스쿨미투의 주체인 학생들이 트위터를 선택한 이유는 그들에게 익숙한 매체이기도 하지만 트위터가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특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처럼 익명의 개인이 폭로하는 방식의 운동은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없고 폭로자가 공동체 내에서 보호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을 때 이루어진다. 이것은 결국 문제 해결이 단순히 가해자를 공동체 내에서 사라지게 하고 처벌을 받게 하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태를 지속할 수 있게 하고 피해자가 폭로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강간 문화’ [각주:6] 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갖는 사회적 태도 때문에 강간이 만연하고 정상화되는 환경을 설명하기 위한 사회학적 개념이다. 강간과 문화라니. 누군가는 이 용어 자체가 낯설고 적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많은 성폭력 사례들이 바로 한국 사회에 강간 문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다. 젠더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만연한 문화의 영향력 안에 있는 공동체의 폭로자들은 2차 피해 [각주:7] 도 빈번하게 겪는다. 피해자의 고발 진위 자체를 의심하거나 가해자의 편을 드는 등의 2차 피해 때문에 피해자는 공개적으로 폭로하기를 꺼리거나 폭로를 용기 내기도 쉽지 않다.

이번 스쿨미투에서 피해자가 겪은 2차 피해는 다른 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들어 피해자의 폭로 자체를 의심하는 발언들이었다. 이러한 2차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9월 이후의 스쿨미투는 트위터의 익명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고 폭로자들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할 때 익명의 폭로자들은 학교와 공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어서 수사의 진행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고발자를 색출해내려 하는 학교 또는 학부모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피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2차 피해로 이어지기가 쉬운 환경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학교의 폐쇄적인 구조 문제이다. 특히 사립 고등학교의 경우 가해 교사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교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익명의 개인으로 SNS라는 장에서 폭로를 통해 가해 교사를 처벌하고자 한다. 문제가 되는 교사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재학생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계속해서 마주쳐야 하고 입시나 진로 선택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11월 3일의 스쿨미투 집회에서 등장한 사립학교법 개정 요구안은 바로 이런 폐쇄적인 학교의 구조에 대한 해결책으로 10대 청소년들이 내놓은 의제다. 사립학교는 교육청의 통제를 직접 받지 않기 때문에 사립학교의 교직원에게 관할 교육청이 징계를 내려도 학교 법인 측이 다시 징계 수위를 결정하면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적이 많았다. 이런 사립학교의 법인이 교육청의 통제 밖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견제해 줄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시급함을 스쿨미투 집회의 참가자들은 강하게 요구했다.

학교와 교사에게 권력을 쥐여 준 사회 구조

10대 여성 청소년의 일상 속 성폭력 사례를 수면위로 드러나게 만든 스쿨미투는 이들의 일상이 대부분 학교에서 이루어지기에 ‘스쿨’미투라는 운동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국은 10대 청소년이라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회다. 누군가는 대안학교 등의, 보통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보편적이지는 않다. 익숙하지만 비합리적인 길에서 벗어나려 하는 순간 모두가 만류한다. 다들 비슷비슷한 환경을 지나오고 그 시기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말을 하다가도 결국 누군가가 그 길을 이탈하려고 하면 그래도 ‘평범하게 남들 다 하는 것’은 일단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대학을 가지 않는 누군가를 조롱하기도 한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청소년에게 “인생 망치려면 혼자 망쳐라”라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0대 청소년의 삶이 학생으로 당연시되는 사회는 학생을 -때로는 가정에 종속된 것 이상으로- 학교에 완전히 종속된 존재로 바라본다. 이 때문에 학생이 교내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고발하는 활동을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학생의 정치적 활동을 고깝게 보는 사회적 시선과도 관련이 있다. ‘정치적 활동은 학생답지 않은 행동이니 그런 일에 관심 끄고 공부나 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광장에 나갔던 10대 청소년은 칭찬과 대견하다는 시선을 받았지만, 모순적이게도 교사와 학부모들은 청소년이 자신의 의제를 가지고 하는 정치적 활동에 고까운 시선을 보낸다.

정치적 활동에는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학생다움의 프레임이다.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과 별개로 학교에서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드러내고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자문자답해보면 쉽게 답할 수 없다. 입시에 관련이 없는 모든 활동, 특히 정치적 활동이 금기시되는 학교는 결국 학생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하며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활동 자체를 낯설게 함으로써 폐쇄적인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어나가는 데 성공했다. “공부나 해!”라고 말하며 대학 입시가 눈앞에 놓여있는 모든 학생의 목표여야 하므로 학교는 입시를 위한 공간이 되고 그 이외의 것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또한 단순히 10대 청소년에게 학생의 삶이 정상성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시기가 결국 학벌이라는 사회의 차별 구조에 학생을 편입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성적으로 학생을 줄 세우기 하며 중·고등학교 때부터 형성되는 학생들의 순위가 곧 학벌로 연결되어 사회에서의 위치로 이어지게 만든다. 대학에 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더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함이라는 명목하에 여태껏 수많은 학교는 인권 침해를 할 명분을 얻어 왔다.

결국 학생과 학교의 권력 구도를 만들고 유지해온 것은 10대 청소년의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는 사회다. 청소년에게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면서 학생이 아닌 삶과 대학에 가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 온 사회, 그리고 사회의 요구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학교의 협업은 10대 청소년의 삶에 가해지는 ‘사회적 가스라이팅’ [각주:8]이었다.

‘미투’의 최전방, 스쿨‘미투’

11월 3일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학생의 날 스쿨미투 집회. 연합뉴스.

10대 여성 학생이 마주하는 학교와 사회의 여성혐오적 시선과 이러한 시선을 방관해 온 구조적 문제들 속에서 스쿨미투를 조명해봤다. 스쿨미투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나의 고등학생 시절에 지금의 스쿨미투 흐름이 등장했다면 함께 할 수 있었을지 자주 고민하게 된다. 그때의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또 지금의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지금의 나는 이들에게 연대하기 참 쉽다. 연대라는 말이 가진 함정에 기대어 학생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해시태그 운동에 동참하고 리트윗도 많이 해봐도 사실 이러한 방식의 연대가 너무도 시혜적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도 부정할 수 없다. 스쿨미투를 학교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만 주목하여 고민한다면 이처럼 표면뿐인 연대에 대한 회의주의에 빠지기 쉽다. 구조의 문제는 개인이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무력한 합리화와 함께, 목소리를 낸 10대에게 연대하며 그 용기에 공감의 뜻을 표현해봤자 결국 이는 그들을 기특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스쿨미투를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각주:9]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 속에서 바라봐야만 한다. 여성에게 페미니즘의 언어가 주어졌기 때문에 미투가 등장하고 스쿨미투가 그에 힘입어 등장할 수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은 기본적으로 연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피해 경험에 공감하고 연대해 줄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많은 페미니즘 운동은 가능했다. 지금의 10대는 페미니즘의 언어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목격한 세대다. 결국 지금의 중, 고등학생들이 구조적 억압 속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미투와 같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스쿨미투는 결국 다른 세대의 페미니스트를 향한 부름이다. 내가 표면뿐인 연대에 대해 고민할 때 스쿨미투의 주체는 페미니스트들의 연대에 또 한 번 기대를 걸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결국 다시 연대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왔다. 여러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식으로 함께 할 수 있는지, 지금의 부름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는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내가 이 글을 연세지에 실으려 했던 이유는 나와 같은 대학생들과 스쿨미투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함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 시기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보냈기 때문에 지금의 학생들도 여전히 똑같은 논리의 여성혐오를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약간의 부채감 또한 공유하고 싶었다.

지난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열린 스쿨미투 집회에서 학생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지난 스쿨미투 집회의 가장 핵심적인 구호였다. 이 구호에서의 ’학교‘는 중·고등학교의 의미로 쓰였지만, 대학교에서 쓰여도 무리 없을 구호다.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에 입학한 우리는 여전히 ’여학생‘으로 살아간다. 스쿨미투는 그리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이지만 현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스쿨미투를 10대 여성 청소년의 의제로 세대를 구분 짓거나 미투의 한 흐름으로 축소하는 것은 이들의 부름에 적절한 연대가 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를 위한 사회는 없었다. 일상적 성폭력, 가스라이팅이 만연했던 학교와 사회를 결국 우리가 무너뜨릴 것이다. 스쿨 미투가 촉발한 청소년 인권, 사립학교법 개정 등의 교육계 재건립 의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여학생을 위한 학교를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성해 (holyorchid@naver.com)

 

  1. 스쿨미투 관련 한국일보 기사 「터질 게 터졌다, 스쿨미투(#MeToo)(2018. 09. 20.)의 제목에서 인용하였다. 해당 본문은 페미위키스쿨미투항목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본문으로]
  2. 미투 운동은 범국가적으로 행해지는 성폭력 고발 캠페인으로나도 말한다’, ‘나도 고발한다는 주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페미위키 ‘MeToo’ 항목 참조) [본문으로]
  3. 여성을 창녀와 성녀로 이분화하여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 쓰이는 여성혐오이다. (페미위키창녀·성녀 이분법항목 참조) [본문으로]
  4. 원래 하네스는 안전벨트나 강아지 목줄 등을 지칭하지만, SM 도구로 사용되면서 성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5. [2018년 중1 교과서] 성차별 요소 여전」, 『교육희망』, 2017. 12. 12. [본문으로]
  6. “‘강간문화라는 말이 불편한 당신들에게”, 오마이뉴스, 2018. 03. 09. [본문으로]
  7. 성폭력 2차 피해는 사건 이후 사법 기관, 의료 기관, 가족, 친구, 언론 등에서 나타나는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 반응으로 인해 피해자가 겪는 정신적·사회적·경제적 불이익, 또는 그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의미한다. (“2차 피해? 2차 가해?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연세춘추, 2016. 05. 07.) [본문으로]
  8. 가스라이팅은 피해자로 하여금 자기 본연의 감정, 본능, 온전한 사리분별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형태의 감정적 학대이다. (페미위키가스라이팅항목 참조) [본문으로]
  9.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이 2015년을 전후로 겪은 일련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손희정이 고안한 개념이다. (페미위키페미니즘 리부트항목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