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산과 낙태 사이
처음 생리를 시작했을 때 가족끼리 둘러앉아 소소한 파티를 했다. 예쁜 케이크에 촛불도 붙이고 가족들도 박수쳐주고 하니 뭔가 좋았다. 이제 정말 여자가 되었다는 축하에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엄마와 언니의 세계에 드디어 나도 들어간다는 생각에 들떴다. 당연히 기뻤다. 그래서일까, 전혀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다. 왜 생리 축하 케이크를 받아들고 기뻐하던 내가 생리대는 쉬는 시간 파우치에 숨겨 몰래 가져가야 했는지, 왜 생리대 광고는 마치 포카리스웨트 광고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고, 청량하고, 그래서 ‘혐오스럽지 않게’ 피마저 파란색이어야 했는지. 아무런 위화감도 들지 않았고,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나는 좀비 영화나 재난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극 속에 나를 대입해볼 때면 굉장히 익숙한 괴리감이 느껴지곤 했다. ‘저기서 생리하면 어떡하지?’ ‘저러다 생리 터지면 진짜 끔찍하겠다.’ 여자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주고받았던 이런 얘기들이 무색하게 극 속의 여자들은 생리를 하지 않는다. (남자) 시청자들 보기에 불쾌하고, 이야기에 방해만 되니까,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교실에서, 광고에서, 영화에서 생리는 숨겨지고 지워진다. 생리란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는 생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생리는 단지 시작일 뿐 핵심은 생리하는 나의 몸, 여성의 몸이 숨겨지고 지워진다는 점이며, 그 종착지는 임신이다.
사회가 정의하는, 정의하고 싶어 하는 생리란 쉽게 말해 ‘임신하는 존재라는 생물학적인 선고, 끝’이다. 분명 생리는 축하받아 마땅하지만, 오직 임신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만이다. 그러니 그 외의 모든 ‘사소한’ 것들, 더럽고 혐오스러운 피, 몸의 변화와 통증, 그 고통스럽고 일상적인 경험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임신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는 임신을 굉장히 존중하고 축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출산이 필요함을 돌려 말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고까운 시선이나 ‘맘충’ 논란 등 소중하다던 임산부에 대한 혐오가 이토록 만연할 리 없다. 이처럼 임신하는 존재는 출산이라는 대의와 겨우 교차해 맞닿을 때만 아슬아슬하게 환영받는다. 그 외 말초적인 몸의 경험은 정말이지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그래서 지워진다.
그러고 나서 바깥을 돌아보면, 일단 ‘출산율’에 대해 엄청 심각하게 떠드는 남자들이 보인다. 다른 한쪽에서는 낙태 1 를 둘러싼 법적, 제도적, 사회적인 논쟁이 시끄럽다. 출산과 낙태는 이렇게 누구나 소리 높여 얘기할 만한 중대한 사안이다. 숭고한 출산과 모성이라든지 산모와 태아의 생명권이라든지 하는 거대한 담론들이 오간다. 거기에, 임신하는 몸뚱어리가 사사로이 들어설 데는 없다. 간혹 옆 구석에서 몸의 주도권을 외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냥 으레 있는 도덕적인 잔소리로, 신경 쓸 필요 없는 착한 지방방송으로 여겨질 뿐이다.
요컨대 여성의 몸은 ‘출산’과 ‘낙태’의 팽팽한 구도 속에 소외된다. 사회적인 산출로서의 출산과 그 역으로서의 낙태만 의미 있게 다뤄지고 그 사이 실재하는 몸의 경험은 지워지는 것이다. 임신 또는 중절하는 여성이 겪는 신체의 변화, 심적인 충격, 이를 다뤄내는 과정, 수술의 고통과 위험성, 더불어 신체 바깥으로부터의 사회적인 고난은 마치 원래 없는 것처럼 소거되며 논의에서 쉽게 배제된다. 임신하는 몸의 외침을 지우는 이러한 출산-낙태의 이분법은 어떤 기제로 작동하고 있을까. 이 불편한 구도를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할까.
당신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학창시절 성교육 시간을 떠올려보면, 그때 내가 봤던 비디오는 항상 두 가지 종류였다. 첫 번째는 난자와 정자의 만남부터 아기의 탄생까지를 보여주는 과학 다큐멘터리였는데, 사춘기 아이들로부터는 별 흥미와 관심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비디오는 비록 부정적이긴 하나 폭발적인 반응을 자아냈다. 그것은 낙태 수술 영상이었다.
수술 도구가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찌르고 조각내어 끄집어내려 하자 태아는 온 힘을 다해 몸을 피해보지만, 결국 조각난 채 끔찍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버려진다. 그 어떤 이도 조그맣고 여린 태아가, 차가운 칼로 난도질당하고, 와중에도 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 무덤덤할 수는 없을 텐데, 더군다나 어린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으악~’, ‘헐~’과 같은 감탄사와 함께 ‘징그러워~’, ‘불쌍해~’와 같은 반응이 이어졌고 눈물을 글썽이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다시 생각할수록 뭔가 찝찝했다. 성교육이랍시고 보여주는 그 영상에서 우리가 ‘교육’받아야 할 건 생명에 대한 죄책감이 다인가? 이 맹목적인 죄의식 ‘교육’은 정당한 것인가? 거기에 특정한 기획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다 최근에야 나는 그 영상이 철저히 왜곡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1984년 미국에서 발표된 <소리 없는 비명>이라는 이 영상은 대부분의 임신중절이 이루어지는 임신 초기가 아닌 임신 후기의 태아를 담아냄으로써 현실을 왜곡했고, 영상 속도를 조작하고 중립적인 의학적 사실을 호도해 ‘낙태로 고통스러워하는 태아’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2 결국 이는 불쌍한 생명을 훼손하려 드는 낙태의 파렴치함과 잔인함을 부각하는 다분히 의도적인 기획이었던 셈이다. 보는 이에게 무조건 죄의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교육’의 이름으로, 심지어 이렇게 조작을 통해서까지 낙태에 대한 죄의식을 ‘주입’받는다. 그러나 이 ‘낙태 비디오’는 그저 일부일 뿐,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 역시 하나같이 낙태에 대해 죄의식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강박적이고 맹목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사회화된다.
계속해서 죄의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출산-낙태의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하고 여성의 몸을 지우는 그 핵심 기제가 바로 죄의식이기 때문이다. 낙태에 덧붙여진 ‘죄’, ‘생명’과 같은 단어는 그 자체로 너무나 강력하다. 소중한 생명이 잔인하게 조각나는 노골적인 이미지는 강한 호소력으로 우리의 시선을 붙든다. 그러면서 그 이미지 바깥, 조각낸 덩어리를 긁어내느라 상처받는 여성의 몸은 자연스레 시야를 벗어난다. 감히 존엄한 생명 앞에 어디 사소한 건강이나 경제적 어려움 따위를 들이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낙태는 죄의식의 맥락 속에서만 다뤄지고, 수많은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도덕적인 강박만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낙태를 타자화한다. 바로 그들 자신의 몸에 대한 일이라는 것도 잊은 채.
나아가 낙태와 출산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낙태의 죄의식만이 강조될수록 반대편의 출산은 한껏 성스러워지고, 그로써 출산-낙태의 이분법 또한 강화된다. 좀 전의 첫 번째 성교육 비디오로 돌아 가보자. 정자와 난자가 어디서 어떻게 왜 나오는지는 알 필요 없다는 듯 꼭 수정체부터 시작되는 그 영상은, 가끔 그곳이 몸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건조하게 도식화된 ‘과학적인’ 이미지를 통해 태아의 성장을 보여준다. 초점은 오로지 생명의 경이로움에, 그러니까 아기에게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그 바깥의 산모는? 임신의 또 다른 당사자인 그 몸은 어떤 변화와 고통을 경험하는가? 그런 것은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아기가 탄생하는 존엄하고 숭고한 태아 비디오,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극악무도한 낙태 비디오. 양극단처럼 보이는 출산과 낙태는 실은 이렇게 도덕으로 사이좋게 맞물린 한 세트다. 그 빈틈없는 접합부에 임신하는 몸의 경험이 들어서기는 어렵다.
“태아의 아버지는 매독, 어머니는 결핵이며 네 명의 자식 중 첫째는 장님, 둘째는 죽었고, 셋째는 귀머거리이자 벙어리, 그리고 넷째 역시 결핵입니다. 배 속의 아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낙태하겠습니다.” 그러면 ‘옳지 잘 걸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다음 문장이 나온다. “당신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3 인터넷에 흔히 떠도는 일화인데, 처음 볼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원작자의 의도대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그렇구나! 낙태 당한 생명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을지 감히 내가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겠구나….’ 물론 지금의 나라면 바로 코웃음 칠 테다. 히틀러였음 어쩔 건데? 배 속의 세포가 인류에게 절대적인 이바지를 한 베토벤이라는 이유로 낙태해서는 안 되는 거라면, 같은 맥락에서 인류에게 절대적인 해악을 끼친 히틀러라면 낙태해도 되는가? 미래의 ‘효용 가치’를 근거로, 더군다나 현재 고통받을 여성의 몸을 지우면서까지 낙태를 죄악시하는 게, 진정 그들이 외치는 생명 존중인가?
이처럼 생명권을 주창하며 낙태에 죄의식을 부여하는 이들의 논리는 전혀 일관적이지 않다. 죄의식의 강조는 그들이 생명의 존엄성에 너무나도 헌신했기에 내린 진심 어린 결론이 아니라, 그저 서늘한 전략일 뿐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을 ‘베토벤을 죽일’ 존재로 만들고, 반대편으로는 ‘히틀러일지라도 숭고한 모성으로 보듬어 줄’ 존재로 몰아넣는 기획 말이다. 죄의식으로 들러붙은 낙태와 출산 사이, 임신하는 몸들은 그렇게 짓눌려왔다.
발 뺄 수 있는 자의 근엄한 가르침
Q. - ‘일베충’ 4 의 반대말은? A. - ‘낙태충’. 2015년 개그맨 장동민과 웹툰 작가 레바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5 를 거치며 인터넷상에서는 다음카페 ‘여성시대’에 대한 혐오 표현이 들끓었다. 특히 몇몇 남초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들을 일베와 맞먹는 악질이라며 ‘여자 일베충’이라고 지칭했고, 급기야는 ‘낙태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일베충 vs 낙태충 누가 더 나쁜가요? - 둘 다 똑같은 사회악입니다.’와 같은 식으로 인터넷상에서 무수히 퍼져나갔다.
공교롭게도 이름조차 ‘여성’시대인 어느 여초 사이트를 모욕할 언어로 하필이면 ‘낙태’가 선택되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만약 생명에 대한 순수한 존중에서 낙태를 죄악시하는 거였다면 낙태가 특별히 여성만을 향한 욕이 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다시 말해 ‘낙태충’ 운운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낙태’가 발화자인 자신과는 관계없는 ‘여성들의’ 일이라는, 자신은 절대 그 단어로써 단죄받지 않으리라는 남성의 굳건한 확신이 자리한다. 따라서 이는 낙태에 덧씌워진 죄의식이 뿌리부터 여성에게 치우쳐있음을, 남성들도 모른 체해왔지만 실은 다 알고 있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죄의식이 여성만을 옥죈다는 점은 특히 성애性愛와 엮이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죄의식에 기초한 출산-낙태의 구도는 성교에 숭고한 출산의 책임을 지운다. 따라서 낙태란 성교는 하되 출산은 거부하는 도덕적인 무책임 그 자체다. 이는 불필요한 성애의 과잉, 즉 성적인 문란함으로 변주되며 죄악시된다. 문제는 이 모두가 여성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낙태 관련 기사에는 매번 ‘낙태 기록 열람 가능하게 해서 낙태한 여자 알아보게 해야 한다’며 화를 내거나, ‘낙태죄 폐지되면 이젠 피임할 필요 없겠다’며 비아냥대는 댓글이 달린다. 여성들이 출산할 것도 아니면서 그들 모르게 아무렇게나 성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임신해도 낙태해버리면 되니까 걱정 없이 더욱 문란하게 자고 다닐 것이라는 멋대로의 상상에, 그들은 그리도 속이 뒤틀리는 모양이다. 출산이라는 책임은 안 지고 쾌락이라는 권리만 누리려는 이기적인 여자들은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해야 마땅한데 말이야.
저급한 인터넷문화의 탓으로, 일부 비정상적인 남성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공적인 차원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낙태죄 헌법소원의 공개변론 절차가 진행된 지난 5월 24일, 당시 조용호 주심 재판관은 청구인 측에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피임도구와 피임약을 사용하거나 사후 피임약을 통해 임신을 피할 수 있는데, 낙태 금지가 임산부의 권리 침해에 해당하느냐’고. 6 더불어 법무부는 헌재에 제출한 변론요지서에서 “원치 않은 임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당하다”며 이를 “성교를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과 출산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 칭했으며, 심지어 낙태 합법화를 마약 합법화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7
그렇다면 죄의식은 어떻게 이토록 여성만을 옥죄도록 설정된 걸까. ‘낙태 비디오’가 상영될 때, 분명히 옆에는 남학생들도 함께였다. 그들 역시 생명에 대한 강박적인 도덕심과 맹목적인 죄의식, 그로써 출산-낙태의 이분법적 구도를 주입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만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야말로 임신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임신하는 몸은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출산과 낙태에서 발을 뺄 수 없다. 일단 임신하고 나면 물리적으로 태아로부터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다. 그러나 남성은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다. 수정의 시점에나 잠시 연결될 뿐 임신이란 그들의 몸과 별개로 벌어지는 사건이니까. 그래서 쉬이 책임을 놓아버릴 수도 있고, 잊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낙태 현황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낙태죄가 사문화된 법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우리 형법은 모자보건법상 인공임신중절의 정당화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행해지는 낙태는 대부분 위의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처벌받아야 함에도, 실제로 기소되거나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다. 8 사회적 차원에서는 낙태를 손가락질하기 바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것이다. 나와 내 주변의 일로 대입해보면 빤하지 않은가. 친한 친구, 누나, 여동생이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임신하게 되었다면? 과연 낙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다들 아는 거다. 임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낙태마저 금지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하지만 공식적 차원으로 나오면 다시금 입을 싹 닫고 전부 낙태의 비도덕성에 대해서만 소리 높여 말한다. 왜 이런 괴리가 발생하는 걸까?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괴리가 왜 발생하는지’가 아니라, ‘괴리의 대가를 누가 감수하는지’로. 이를 온전히 감내하는 것은 바로 임신하는 몸들이다. 임신하지 않는 몸들은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낙인 사이의 복잡한 영역을 편하게 내버려 둘 수 있다. 어쩔 땐 낙태의 효용을 취했다가, 어쩔 땐 단죄의 몽둥이를 들었다가, 그때그때 편할 대로 대응할 수 있다. 그들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니까, 언제든 발을 빼기만 하면 되니까. 이처럼 낙태와 관련해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죄의식의 구도는 태초의 생물학적인 몸 그 자체에 근거한다. 여태 모르는 척 죄의식과 도덕으로 꽁꽁 포장해놓았지만, 그것은 뿌리부터 여성만을 향하도록 설정된 것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싸튀충 9 도 같이 처벌하자!” 여성만을 향했던 죄의식의 멍에와 도덕적인 낙인을 남성에게도 부과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정립하자는 것이니, 일견 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도덕을 얘기하는 한 우리는 산모와 태아의 생명권을 저울질하는 식의 논의밖에 할 수 없고, 거기서 남성은 어느새 쏙 빠져버린다. 그러니 남성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다 한들 현실적으로는 임신하는 몸에 묶인 여성이 독박으로 감당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기존의 도덕 중심적인 시각을 문제 삼지 않고 이를 그대로 남성에게 추가로만 적용하겠다는 ‘싸튀충도 처벌하라’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미 기울어진 구도 위에 성립한 도덕을 고수하는 이상 여성은 영원히 피해자일 테고, 발 뺄 수 있는 자들의 기도 안 차는 거드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수업이 끝날 즈음의 일이다. 교수님이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을 위한 종이를 강의실 뒤편에 놔둘 테니 나가면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마지막에 ‘할 사람만 하라’며 한 마디 덧붙이셨으니, 강요는 아니었다. 속에서 불쾌함이 치밀었지만 거기서 아무 말도 못 했고, 또 그런 나 자신이 치욕스러웠다. 당연히 서명하지 않을 거였지만 소심한 마음에 내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혹시나 성적 관련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지, 거기에 왠지 모를 부끄러움도 함께, 온갖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때 내 앞에서 서명을 휘갈기고 나가는 몇 남학생들의 근심 걱정 없는 맑은 표정을 봤다. 그리고 이 이상한 사회를 체감했다. 아 정말, 저들의 일이 아니구나. 세상에는 ‘이기적인 여자들’을 탓하는 엄격 근엄 진지한 말들이 가득하다. ‘낙태하지 말라.’ ‘생명을 사랑하라.’ 그러나 발 뺄 수 있는 자들의 가르침은 얼마나 공허한가.
거꾸로 가는 국가
그렇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출산-낙태의 이분법과 그 근간이 되는 기울어진 도덕의 구도 자체를 깨고, 여성의 목소리를 더욱 발굴하고 반영하는 것일 테다. 이는 다시 말해 ‘자연’의 영역에 머무르던 임신하는 몸의 경험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이라는 단어만큼 정치적인 게 또 있을까. ‘자연스럽다’, ‘원래 그렇다’는 말은 대단한 논리 없이도 무한한 설득력을 가지며 수식하는 모든 것을 ‘당연한 일’로 붙잡아둔다. 이는 결국 정상성의 논리로,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목소리는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배제 및 비가시화된다. 임신 역시 여성이라면 생물학적으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아픔을 말하는 목소리는 자연이라는 벽에 막혀 더는 논의되지 못하고 수그러든다. ‘임신의 고통? 그거 다들 겪는 거야. 당연한 거야. 어쩌겠어, 조금만 참자.’ ‘경력 단절? 참 안타깝지만, 원래 여자가 아이를 낳는 건 당연한 거잖아. 아기에겐 엄마가 필요해. 돈은 내가 벌게. 어쩔 수 없지.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다. 정글이나 초원에 사는 야생의 동물들이야 본능적인 생식의 사이클에 전적으로 의존해 움직인다지만, 우리는 아니다. 인간은 자아실현이라는 사회적인 목표를 새로이 고안해냈다. 그리고 적어도 21세기에는,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날 때부터의 차별적인 조건 때문에 좌절되지 않아야 함에 다들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임신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자연의 논리를 들이대곤 한다. 태어나고 싶어 여성으로, 임신하는 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임신이라는 선천적인 생물학적 한계가 사회적인 자아실현의 족쇄가 되지 않도록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던 그 고통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상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낙태권은 가장 기초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의 보상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낙태를 기본적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여성들이 자연 상태에 머무르기를 강제하는 것과 다름없다. 동물적인 신체에 가로막혀 동등한 사회적 가능성을 박탈당한 그들에게 일말의 자구책조차 앗아가는 셈이다. 이는 개인의 자기결정권 침해일 뿐만 아니라 불평등한 차별취급행위다. 10 임신하는 몸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 몸 자체가 불평등한 족쇄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거꾸로만 가고 있다.
“낙태아수가 출생아수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라가 그 아이들을 다 키워줄 준비가 돼 있다면 낙태를 왜 하겠느냐.” 지난 5월 31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저출산과 관련해 비공식 발언한 것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11 나라가 양육의 부담만 덜어준다면 여성들이 낙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 확신에 찬 반문이 불쾌한 것은, 지금도 음지에서 수없이 행해지는 여성들의 결단을 얄팍하게 뭉뚱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불평등한 동물적인 족쇄를 끊어내고 사회적 존재로 굳건하게 서고자 몸부림치는 여성은 없고, 출산이라는 사회적 가치로 이어지지 못한 ‘출산 불발’로서의 낙태만 있다. 대부분의 여성인권 관련 청원이 수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근황은 미적지근한 것 12 으로 추정컨대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스스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까지 천명했던 국가 수장의 무신경함은 충분히 실망스럽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8월 정부는 보건복지부 고시를 통해 낙태를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포함시키기까지 했다. 13 이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국민적 합의에 의한 납득할만한 고시가 나오기 전까지 낙태 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이 받게 될 형국이다. 14 더불어 2012년 헌법재판소는 이미 낙태죄가 합헌이라고 결론 내렸다. 10월에 새로 출범한 헌법재판소 6기에서는 이와 달리 긍정적인 결론이 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법무부는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기준을 더 확대하는 방향을 논의하되 낙태죄는 그대로 합헌으로 본다고 못 박은 바 있다. 15
이처럼 현재 국가는 임신하는 당사자의 경험을 사회적인 차원에 반영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출산-낙태의 얄팍한 이분법에 기초한 기존의 불평등한 구도를 도리어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라면 여성은 그저 출산을 위해 ‘기능하는’ 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무신경함을 넘어선 무언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성은 잠자코 자연의 영역에 머무르라’는 확인사살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임신하는 몸의 외침을 들을 생각이 없다.
출산과 낙태 사이, 임신하는 몸이 있음을
이 글에는 ‘임신’이 자그마치 60번 나온다. 하지만 정작 저자인 나의 삶에 임신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등장할지를 묻는다면, 0에 수렴한다고 답할 것이다. 나는 임신은 물론 현재로서는 결혼할 생각 또한 추호도 없고, 이미 내 인생을 이에 맞춰 대략 설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문제 삼을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어째서, 무슨 자격으로 임신을 말하는가? 더구나 한국 통념상 ‘임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을 독자로 두고 있는 연세지에서 굳이 왜?
나는 항상 여자 짝꿍이 부족하던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현재, 저출산이 문제라며 심각하게 떠드는 기사들은 ‘90년대 성행했던 여아 낙태’ 16 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다들 모르는 척하는 건지, 하나같이 집값이 어쩌고 취업률이 저쩌고…만 운운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거기에 ‘90년대생이 저출산의 마지막 희망’ 17 이라며 적반하장의 압박까지 주곤 한다. 정작 당사자인 내 의사는 상관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착착 진행되는 이 무언의 구도가 께름칙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그러니까 실은,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출산과 낙태 사이 ‘임신하는 존재’인 우리의 외침은 처음부터 지워져 왔다는 것을.
임신, 출산, 낙태. 그 모든 산발적인 퍼즐을 짜 맞추면 보이는 건, 우리의 몸을 갉아먹는 거대한 하나의 기획이다. 따라서 임신은, 출산은, 낙태는 언제나 당장 우리 모두의 일이다. 아무리 굳게 비혼·비출산을 선언한들 우리는 여전히 임신하는 몸이고 미래에도 줄곧 그럴 것이다. ‘너 임신할 수 있어!’를 고래고래 외치며 쏟아져 나오는 핏덩이를 한 달에 한 번씩 경험하는 이상 우리는 몸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펜을 들었다. 우리의 몸에 대해, 정확히는 우리의 몸을 쥐고 흔드는 무언가의 정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그것은 어릴 때부터 맹목적으로 주입되는 낙태에 대한 죄의식, 그로써 성립하는 출산-낙태의 이분법적인 구도, 그 구도의 뿌리 깊은 불평등, 그리고 모른 척 이를 부추기기만 하는 국가였다. 나는 여기에 더는 얽매이거나 휘둘리고 싶지 않다. 다들 마찬가지일 거라 감히 단언한다.
그러니 우리는 임신하는 존재로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부조리를 외치고 드러내고 조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를 압박하고 집단행동에 나서거나 언론에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겠고, 왜곡된 출산-낙태 서사를 재생산하는 미디어와 성교육을 비판하고 항의할 수도 있겠다. 길은 다양하다. 그 과정에서 핵심은 기존의 기울어진 도덕을 허무는 일이다. 도덕은 투쟁으로써 경신되어온 것이지 절대적인 정언명령이 아니다. 새로이 발굴한 여성의 경험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식으로 쌓아올린 불평등한 관념의 장을 벗어나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임신하는 몸의 외침을 새겨듣자.
472 (rooibos17@naver.com)
- ‘낙태(落胎)’라는 용어는 태아 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며, ‘떨어지다’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에 따라 중립적인 의료 용어인 ‘임신중절’ 혹은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임신중단’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일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표현이 ‘낙태’이므로, 본고에서는 용어를 통일하여 ‘낙태’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모임 ‘비웨이브(BWAVE)’는 문제의 영상이 실제 대부분의 임신중절이 이루어지는 임신 12주 이전의 상황이 아니라 임신 후기의 태아를 보여줌으로써 본질을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하충식 산부인과 전문의에 따르면 임신 12주 이전 태아는 고통을 느낄 만큼 감각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존 호빈스 예일대 의과대학 교수 또한 초음파 영상이 의도적으로 조작·과장되었다고 밝혔다. (“죄책감 갖게 만드는 부정확한 성교육…‘낙태의 진실’ 호도”, 한겨레, 2018. 01. 01.) [본문으로]
- Maurice Baring이 쓴 이야기로, 1962년 11월 14일 자 『The Times』에서 Enid Bagnold가 인용하였다. 이후 전파 경로는 명확하지 않으나 인터넷상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극우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의 약칭 ‘일베’와 벌레를 뜻하는 접미사 ‘-충’을 결합한 말로, 외국인 혐오·여성 혐오·종북몰이 등을 일삼는 이용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네이버 오픈사전) [본문으로]
- 일부 누리꾼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여성시대’의 조직적 활동으로 인해 개그맨 장동민의 커리어가 하락했다고 주장했으며, 웹툰 작가 레바 논란과 관련해서도 과도한 마녀사냥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e톡톡]온라인 커뮤니티 ‘여성시대’ 수난…‘제2의 일베’ 논란도”, 뉴스1, 2015. 05. 11.) [본문으로]
- “‘낙태죄 처벌’ 헌재 공개변론…태아 생명권 vs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 공방 치열”, 아시아투데이, 2018. 05. 24. [본문으로]
- “낙태하면 ‘책임지지 않는’ 여성?…법무부 변론서 논란”, KBS 뉴스, 2018. 05. 24. [본문으로]
- 양현아, 「낙태에 관한 다초점 정책의 요청 : 생명권 대(對) 자기결정권의 대립을 넘어」, 『한국여성학』, 26(4), 2010.12, 64쪽. [본문으로]
- ‘싸고 튄 남성’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낙태 경험 여성을 비난하는 ‘낙태충’에 대한 미러링 단어이다. 임신·출산·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사회적 관행을 풍자한다. (페미위키) [본문으로]
- 남정아·이상경, 「형법상 낙태죄 처벌규정의 위헌성에 대한 재조명」, 『서울법학』, 25(2), 2017.08, 70-72쪽. [본문으로]
- “文대통령 ‘출산보다 낙태가 많을지도…’”, 머니투데이, 2018. 06. 04. [본문으로]
-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 합법화’, ‘히트 앤드 런 방지법’,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등 다수의 청원이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음에도 실질적 변화는 더딘 상황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무용론?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어디갔나...”, 일요신문, 2018. 10. 19.) [본문으로]
- 보건복지부는 2018년 8월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안을 통해 ‘비도덕적 의료 행위’에 불법 낙태를 포함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보건복지부가 결국 2년 만에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낙태 수술'을 포함시켰다”, 허핑턴포스트, 2018. 08. 23.) [본문으로]
- “산부인과의사회 ‘복지부가 비도덕 의사 낙인…낙태수술 거부 계속할 것’”, 이데일리, 2018. 09. 28. [본문으로]
- “박상기 장관 ‘낙태죄 형사처벌 유지…허용기준은 확대해야’”, 이데일리, 2018. 10. 23. [본문으로]
- 의료 기술 발달로 태아 성별 판별이 가능해지며 여아 선별 낙태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성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1990년 ‘남녀 성비 최대 116’…현재에도 미친 영향은”, 세계일보, 2018. 07. 11.) [본문으로]
- “아이 안 낳는 한국, 1990년대생이 마지막 희망”, 조선일보, 2017. 09. 09. [본문으로]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19호> 닭이 울어야 세상이 산다_편집위원 녕 (1) | 2025.12.23 |
|---|---|
| <119호> 학부생 나부랭이의 미시경제학 불평_편집위원 nope (0) | 2025.12.23 |
| <118호> 스쿨미투, 여학생을 위한 사회는 없었다_편집위원 성해 (0) | 2025.12.23 |
| <118호> 한남이 한남에게_편집위원 얀 (0) | 2025.12.21 |
| <118호> 이상한 나라의 대학생_편집위원 지민 (0) | 202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