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먹는 것은 '닭'인가, '치킨'인가
내가 학관에서 가장 즐겨 먹는 메뉴들은 학관 1층 식당에 있는 토리 벤토와 닭 가라아게 덮밥, 불닭 오므라이스다. 밥을 먹고 싶을 때는 위의 메뉴를 찾고, 가끔 크림 파스타를 먹고 싶을 때면 닭가슴살 크림 파스타를 찾고는 한다. 이 모든 메뉴의 공통점은, 닭고기가 들어간다는 점이며 웬만해서 4~5천 원이면 사 먹을 수 있는 식사라는 점이다. 이뿐인가? 송도에서 1학년을 보낸 연세인이라면 대부분 ‘치킨’에 대한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기숙사의 커뮤니티룸이나 ‘치킨 계단’이라 불리는 계단에서 학생들이 가장 자주 시켜 먹는 배달 음식은 치킨이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사안은 아니다. 한국에서 닭백숙은 예전부터 축제의 음식이었고, 1970-80년대에 등장한 ‘후라이드 치킨’은 1997년 이후 단 한 번도 한국 사회에서 외식 메뉴 1위를 뺏긴 적이 없다. 그래서 한국의 후라이드 치킨과 치맥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해주는 유튜브 채널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이기도 하다. 새삼스럽지만, 닭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먹는 음식이고 ‘당연’한 음식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축제의 음식이었던 닭이 언제부터 이렇게 흔해졌나? 치킨과 삼계탕 속 닭고기의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내가 최근에 살아 있는 닭을 본 적이 있나? 농촌이라면 모를까, 서울 등의 도시에서 살아 있는 닭은 너무나 낯설다. 기껏해야 닭띠 해가 찾아오면 어딘가에서 등장하는 귀여운 일러스트나, 초등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들만이 전부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살아 있는 ‘닭’과 도축되고 가공되어 나에게 전달되는 ‘치킨’은 이리도 괴리감이 큰 것일까. 그 많은 닭은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사라질까.
마침,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건들에서 닭은 항상 등장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촉발된 촛불시위에서 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멸칭은 ‘닭근혜’, ‘닭그네’였다. 전 박근혜 대통령이 닭만큼 멍청하다는 의미에서 나온 멸칭이었다. 위디스크 회장 양진호가 직원들에게 직접 칼로 찌르라고 한 동물 역시 닭이었다. 한편으로, 배달의 민족에서 국내 치킨 제품들의 맛과 향을 감별 능력을 겨루는 이벤트인 ‘배민 치믈리에 자격시험’을 열었을 때, 동물 복지운동가들이 동물권을 주장하며 난입하기도 했다. 1 닭은 우리의 눈이 닿는 곳이든 닿지 않는 곳이든, 한국 사회 어디나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익숙한 ‘치킨’보다는 ‘닭’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인간과 닭은 그동안 어떻게 역사에서 공존했으며, 한국 사회에서 닭은 어떤 존재였나? 그리고 한때 닭백숙이었던 닭이 어떻게 ‘치킨’이 되었으며, 그 많은 닭이 어떻게 키워져서 사라지는지도 알아볼 것이다.
닭은 언제부터 '치킨'이 되었나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새, 닭
닭은 현재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가축이다. 세상의 고양이, 개, 돼지, 암소, 거기에 쥐와 새까지 더해도 닭의 총합을 이기지는 못한다. 현재 지상에는 약 200억 마리의 닭이 살고 있으며, 이 숫자 역시 인간의 세 배에 달한다. 시베리아에서 남대서양의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이르기까지 닭은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새이며, 심지어 미국 항공 우주국(NASA)는 닭이 화성 여행에도 살아남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2 단언컨대, 닭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새이자 가축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친근한 닭의 고향은 어디일까? 지금 집닭의 모습을 보면 잘 상상이 안 되지만,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닭의 조상은 동남아시아 밀림에서 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남아시아 밀림의 여러 야생 닭 중에서도 적색야계(red jungle fowl, 학명 Gallus gallus)가 현재 집닭의 조상격이다. 1911년 미얀마 북부에서 처음으로 적색야계를 연구한 조류학자 월리엄 비비는 “깊은 밀림에서 진짜 야생의 이 새를 보고 나면 결코 잊지 못한다.”라 회고했다. 곡식, 풀, 죽은 고기 등 사람의 주식보다 살아 있는 벌레를 더 좋아했던 닭은 초기 농부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적색야계의 뛰어난 적응력을 토대로 닭들은 카누를 타고 베트남의 메콩강을 내려갔고, 무역업자의 등나무 바구니에 실려 히말라야산맥을 넘기도 했다. 닭은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가로질렀고, 17세기에 이르러 닭은 인간이 사는 모든 대륙에서 살게 되었다. 닭은 폴리네시아 식민주의자들의 먹이가 되기도 했고, 산업혁명 초창기에 기근을 물리치기도 했다.
닭에서 ‘프라이드 치킨’으로
그러나 오랫동안 닭은 매일 먹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동료였으며, 가끔 먹는 축제의 음식이었다. 또한 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축제를 열 정도로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안 쓰이는 곳이 없는 만병통치약이었고,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한 닭이 ‘치킨’이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양계산업 역시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미국 사회에서 같은 가금류 중에서도 칠면조보다 천대받던 닭은 보편적인 음식으로 떠오른다. 흑인 노예들이 미국에 오기 전부터 기름에 튀겨 향신료와 함께 먹던 닭튀김은, 미국에 이르러 서양식 요리법과 결합하여 미국의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흑인과 여성 중심의 산업을 백인 남성이 전유하는 유구한 전통은 양계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한때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농장의 아프리카계 흑인 구역에서 발견된 뼈의 3분의 1은 닭 뼈였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남부에서 북부로 온 흑인들은 북부에도 닭고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때 값싼 닭고기는 유대인 주부들의 주된 요리 재료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점점 커지던 양계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식량을 늘리기 위해 투입된 식자재가 바로 닭고기였으며,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내일의 닭’ 위원회가 결성된다. 그러나 ‘내일의 닭’ 위원회에 여성과 흑인은 없었다. 18세기부터 양계산업의 주축이었던 흑인과 여성은, 1950년대 이후 산업화와 국가정책으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난다. “부드러운 닭을 만드는 건 강인한 남자들이 할 일이죠.”라는 1970년대 미국의 유명한 TV 광고문구가 이러한 현실을 대변한다. 이 과정에서 프라이드치킨은 미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프랜차이즈, 스타, 스포츠, 맥주가 모두 섞인 한국의 ‘후라이드 치킨’
그리고 이 미국식 프라이드치킨은 6.25전쟁 시기에 이르러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흑인 노예와 여성의 음식으로서 천대받던 ‘소울 푸드’ 프라이드치킨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한국 사회에는 ‘고오급’ 서양 문물의 상징으로 들어왔다. 미군들이 먹던 칠면조 요리를 보며 한국인들은 ‘칠면조 대신 치킨’을 먹었다. 6.25 전쟁 전후로 미군처럼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카드를 쓸 때 곁들여진 음식이 바로 프라이드치킨이었다. 이를 간파한 KFC는 1984년에 한국에 공식 진출을 했을 때, ‘미국 본토에서 온 오리지널KFC’ 캐치프레이즈로 마케팅에 성공했다. 3 이처럼 서양 문물로서 들어온 미국의 프라이드치킨은 곧 한국 사회에서 ‘후라이드 치킨’, ‘치맥’, ‘파닭’ 등으로 진화했다.
1997년 이후 치킨이 외식 메뉴 부동의 1위에 굳건히 자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치킨만큼 남녀노소 가림 없이 모두가 잘 먹을 수 있는 외식 메뉴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킨은 수요도 많지만, 공급도 많은 외식 메뉴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반 농담으로 하는 “이공계도 결국엔 치킨집”이라는 말은, 아주 서글픈 현실에서 비롯된 말이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영업 비율이 높으며 기업의 고용 안정성이 낮은 한국에서, 가장 만만한 창업은 바로 치킨집이다. 다른 외식업에 비해 창업비용이 적게 들며, 요리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도 단기간에 교육을 받고 창업할 수 있기 때문에 치킨 업계는 남성 창업자 비율이 높기도 하다. 그 결과, 250여 개의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들은 ‘대박 신화’로서 퇴직자들과 창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결과 현재 한국 치킨점의 수는 3만 5천-5만여 곳으로 추정된다.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들의 횡포는 언론에서 심심찮게 다루어지긴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안전빵’의 효과로 프랜차이즈에서 벗어나 창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같은 프랜차이즈라도 서열이 있고, 돈이 있는 자가 1등 프랜차이즈의 지점을 낼 수 있는 구조는 치킨 업계에서 견고하다. 길거리와 배달 앱에 수두룩한 치킨집들은 이러한 프랜차이즈 구조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치킨 프랜차이즈의 구조는 광고모델과 스포츠와 치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 톱스타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 모델들의 각축장이 된 시장이 바로 치킨 시장이다. 스포츠는 어떤가. 한국에서 치킨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시기는 바로 2002년 월드컵 전후였다. 당시만 해도 만여 점에 이르렀던 치킨점이 2002년 이후 71% 증가하면서 전국에 2만 5천여 개로 늘었다. 이 시기는 ‘치맥’의 전통이 처음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월드컵 시즌이 마침 ‘복날 특수’ 시즌이었기에 2002년 여름은 닭의 전성기였다. 그 이후로도 스포츠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계 중 하나는 바로 치킨 산업이다. 스포츠 마케팅 시장에 뛰어드는 한국 치킨 프랜차이즈들의 ‘치킨게임’은 치킨집 사장들의 노력에서 나오고, 스포츠의 다양한 이벤트 비용마저 점주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과 함께 등장한, 치킨의 가장 최근 트렌드는 ‘치맥’이다. 2013년 처음 개최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향토적인 음식이 아닌 ‘치맥’을 내세우면서 참가 인원 30만 명을 돌파한 점에서 보다시피, ‘치맥’은 새로운 축제의 조합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치킨의 이미지는 프랜차이즈도 있지만,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것은 모델, 스포츠, 그리고 치맥이다. 이는 한국의 프랜차이즈 치킨공화국의 중요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가 만나는 치킨은 단순히 서양 문물의 상징이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치킨’의 이미지에는 근대화와 배달, 프랜차이즈와 스포츠, 그리고 치맥이 자리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닭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치킨이 아닌, 치킨의 재료가 되는 살아 있는 닭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치킨공화국의 이면, 조류 인플루엔자와 살처분
원작이 있는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의 첫 장면은 양계장에서 시작된다. 닭마다 겨우 몸을 하나 넣을 수 있는 우리 속에서 암탉들은 평생 모이를 쪼아 먹고 알을 낳다가 죽는다. 비록 애니메이션이지만, 매일같이 알을 낳고 죽임당하는 현실 속의 닭들이 처한 상황 역시 그렇게 다르지 않다.
놀랍게도, 인간이 그동안 겪어왔고 지금까지 겪어왔던 전염병은 대부분 동물의 가축화에서 유래되었다. 소와 양을 가축화하면서 홍역 바이러스가 생겼고, 천연두는 낙타에서 유래하였다. 야생 돼지를 가축화하면서 백일해가 생겼고, 닭에서 그 유명한 장티푸스가 유래되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조류인플루엔자(AI), 독감은 오리에서 유래하였다. 다행히 그 시기에 생긴 바이러스들은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바이러스들은 또 다른 바이러스들이다. 그중 하나가 1970년대에 등장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를 비롯한 21세기 전염병의 원인을 연구한 세계보건기구(WHO), 식량농업기구(FAO), 국제수역사무국(OIE)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전 세계에서 급증하는 동물단백질 수요와 공장식 축산이다. 현재 공장식 축산 과정 속의 닭들은 밀폐된 축사에서 수십만 마리가 수용되어 사육된다. 이와 다르게 방사 사육되거나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농장에서 자란 닭들은 조류인플루엔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조류인플루엔자의 가장 좋은 예방책 중 하나가 바로 자외선과 햇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는 한국 사회에서 2003년 이후 꾸준히 발병했으나, 정부는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에 대처한 대표적인 방식은 바로 가축의 살처분이다. 2014년에는 닭, 오리 등의 조류 가축이 100여 일에 걸쳐 1400만 마리가 도살 처분되었고, 2016년에는 11월 최초 발생 이후 무려 한 달 만에 1400만 마리의 닭, 오리 등이 살처분되었다. 말이 좋아 살처분이지, 살아 있는 닭 수만 마리를 땅에 묻고 크레인으로 흙을 묻는 장면은 농장 주인뿐만이 아닌, 집행하는 공무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황윤 감독의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는 가축 살처분을 진행한 공무원의 인터뷰와, 살처분 이후 정신치료를 받은 공무원들의 그림이 등장한다. 그림 속에는 닭, 돼지 등이 살처분되는 모습이 잔인하게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어떤 공무원들은 공무원을 그만두고, 또 누군가는 자살에 이르기도 했다. 인터뷰에 응한 공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가면 많은 생각이 들어요.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거든요. 지금은 내가 가축을 이렇게 죽이지만, 만약에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면 내가 똑같이 실행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죠.
이렇게 길러지고 죽어가는 닭들이 여전히 보신용의 삼계탕, ‘몸에 좋은’ 고기로 소비되는 것은 꽤 기괴하다.
죽은 '고기' 대신 살아 있는 '동물'로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에게 ‘치킨’은 익숙하고 ‘닭’은 낯선가? 닭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기’를 동물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동물’과 ‘고기’를 다른 개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인 개를 식용으로 먹는 것과, 닭/돼지/소와 같이 ‘고기’를 위해 길러지는 가축을 먹는 것의 거부감은 천지 차이다. 더 나아가, 대다수 가축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조차 단지 ‘고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삼계탕집에 있는 친근한 닭 사진과 일러스트는 살아 있는 닭을 도축하는 행위를 가리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가축’을 ‘고기’로 보지 않고 ‘동물’ 혹은 ‘생명’으로 보는 순간, 현대인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황윤 감독의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보면, 실제로 자연식 돼지농장에 다녀온 황윤 감독의 유치원생 아들은 돈까스를 못 먹게 된다. 돈까스를 ‘pork’가 아닌 ‘pig’로 보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기’를 ‘고기’로만 보게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현재의 공장식 도축 시스템 때문이다. 황윤 감독은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취재하기 전에는, 자신의 천안 아파트에서 30분 거리에 돼지 농장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는 <잡식가족의 딜레마> 자료조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살아 있는 돼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시 거주민들 역시 살아 있는 가축 동물을 본 경험이 많이 없을 것이다. 근대화 이전 가축을 직접 키우고 잡고 손질했던 이들은 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았다. 적어도 동물들이 어떻게 키워지고, 어떤 희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거의 인간들은 닭, 돼지, 소 등의 가축을 동물 신으로서 섬기기도 했으며, 사회 속에서 동물에 대한 최소한의 환경은 갖추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은 동물이 고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지 못한다. 가축이 살아 있는 모습 자체를 보지 못하니, 고기는 죽은 동물의 결과가 아니라 공산품 1처럼 인식이 된다. 그 과정에서 동물의 희생과 죽음은 지워진다. 그 결과, 현대 인간 사회는 예전처럼 동물의 희생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성찰하지도 않는다.
고기는 분명 인류에게 오랫동안 많은 도움을 준 음식이다. 인류는 고기를 불로 익혀 먹는 법을 배우며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 4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엄청난 규모로 발전한 현재의 육류 산업은, 더 이상 농장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지난 50년간 고기가 축제의 음식에서 일상의 음식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육류산업이 밀집 동물사육시설을 토대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가축을 한데 모으고 키우는 밀집 동물사육시설은, 미국의 1930년대 양계업에서 출발했다. 밀집 동물사육시설의 등장 이전, 닭은 계절 음식이요 일요일 저녁의 별미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사람들은 닭에게 비타민 D를 지속해서 먹이면 일 년 내내 실내에서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닭에서 시작된 밀집 동물사육시설은 돼지로, 소로 확장되었다. 점차 많은 가축 동물들이 밀집 동물사육시설에 길러지는 동시에, 그들은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다. 그만큼 인간은 가축의 환경에 무지해졌다. 가축들이 얼마나 많이 항생제를 맞는지, 얼마나 시설에서 전염병이 퍼지기 쉬운지는 도시인에게 뉴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인간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걸려도 대부분 철새 탓으로 생각하지, 밀집 동물사육시설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치킨공화국과 김치 삼겹살은 쉽게 통용되는 ‘우리’의 이야기이지만, 조류인플루엔자와 채식은 ‘남’의 일로 여겨진다. 즉, 현대인에게 통용되는 고기-동물 이분법은 고기의 출처를 가린다.
그리고 이 거대한 이분법의 구조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처음 이를 발명한 미국에서는 이러한 밀집동물사육시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농업과 축산업이 주인 브라질 등의 남미 국가들, 중국, 인도 등에서는 농업의 양상이 바뀔 정도로 밀집동물사육시설이 도입되었다. 대부분 가축을 더 빠르게 기르기 위해 항생제가 투여되고, 이로 인해 인간은 여러 가지 질병에 더욱 취약해진다. 밀집사육시설에서 길러지는 동물들 역시 질병에 취약해지며, 전통 사육 방식보다 훨씬 많은 배설물과 가스가 배출되면서도 처리가 쉽지 않다. 그러는 동안 배를 불리는 것은 개발도상국에 점점 밀집동물사육시설을 도입하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5
이렇게 키워지는 ‘고기’가 정말 인간에게 좋은가? 과연 어떤 인간에게 좋은가?
닭은 마당을 나와서 울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닭은 동반자이자 축제의 음식으로 출발했지만, ‘치킨’이 되면서 근대 사회에서 일상의 음식이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는 흑인과 여성의 음식에서 남성의 음식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치킨’은 근대화의 상징이자 스포츠, 광고모델, 치맥 등을 수많은 의미를 포괄하는 외식 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닭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닭은 그전에 없던 병을 앓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모이를 쪼아 먹던 닭은 양계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에 조류 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 등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전염병에 걸린 닭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땅으로 묻히고 말지만, 인간은 더 이상 ‘치킨’에게서 살아 있는 닭을 보지 못한다. ‘치킨’은 그저 ‘치킨’일 뿐이다. 즉, 대부분의 현대인은 ‘치킨’에게서 생명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뉴스에서 나오는 조류 인플루엔자니 구제역이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매일같이 ‘치킨’을 찬양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닭을 죽은 고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로 보면 뭐 어쩔건데?
닭은 ‘치킨’ 이외에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 가지는 의미가 컸다. 찰스 다윈은 닭 덕분에 진화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했고, 루이 파스퇴르는 닭을 이용하여 최초의 근대적 백신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닭은 가금류로는 최초로 게놈(유전체)이 해독된 동물이다. 이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식탁에 매일 오르는 닭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치킨’이 아닌 닭은 경멸한다. 영어에서 ‘Chicken head’는 멍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한국 사회에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담은 꽤 오랫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그 표현 속 전제들은 모두 틀렸다. 닭은 서로 서열이 분명할 정도로 사회화가 잘 되고 지적 수준이 높은 동물이다. 오랜 기간 동안 암탉은 울지도, 마당을 나오지도 못했다. 인간이 보는 ‘Chicken Head’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아 온종일 사육장에서 모이를 먹는 닭이다. 그러나 이토록 인간이 경멸하는, 먹기만 하는 닭은 닭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먹는 인간과 자연에도 결국 악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인간은 닭을 경멸할 자격이 없다. 이 오래된 경멸과 혐오를 뛰어넘기 위해서, 아니 인간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치킨’이 아닌 살아 있는 닭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닭은 사육장을 나와 마당에서 울어야 한다.
그러므로 <잡식가족의 딜레마>의 황윤 감독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단순히 ‘치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앞에 놓인 치킨과 닭가슴살과 닭발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에. ‘닭이 울어야 세상이 산다.’는 명제에 동의할 수 있기에.
녕 (laurenrhee34@gmail.com)
- “‘치믈리에’ 시험장에 ‘닭 먹지 마라’ 동물복지 운동가들 난입”, 경향비즈, 2018. 07. 22. [본문으로]
- 앤드루 롤러, 『치킨로드: 문명에 힘을 실어준 닭의 영웅 서사시』,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2015. [본문으로]
- 정은정, 『대한민국 치킨전: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2014. [본문으로]
- 리처드 랭엄, 『요리본능: 불, 요리, 그리고 진화』, 사이언스북스, 2011. [본문으로]
- 케이티 키퍼, 『육식의 딜레마: 우리가 먹는 소, 닭, 돼지는 어디서 오는가』, 강경이 옮김, 루아크, 20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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