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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8호> 한남이 한남에게_편집위원 얀

by yonseiji 2025. 12. 21.

 

You = I = 한남

2018년 10월 27일 혜화역에서 당당위[각주:1] 의 곰탕집 사건[각주:2]에 대한 사법부 판결 규탄시위와 함께 남함페[각주:3] 의 2차 가해 규탄 맞불 시위가 있었다. 이번 시위가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단연 ‘한국 남성’의 시위와 ‘한국 남성’의 맞불 시위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각 시위에서는 한국 남성의 위치를 상반된 모습으로 규정했다. 당당위는 한국 남성의 억울함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면 남함페는 한국 남성이 젠더권력을 성찰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한국 남성’이란 말이 묘해진 것은. 모두가 알겠지만, 한국 남성은 더 이상 단순히 korean men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남이 한남에게’라는 제목이 누군가의 버튼을 눌렀을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한남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벌금 30만 원이 선고된 사례가 있긴 하다. 당시 재판부는 ‘한남충’이라는 표현에서 ‘충’이 벌레라는 뜻으로 부정적 의미가 강하고 한국 남성 전체를 대상이 아닌, 피해자 개인을 대상으로 글을 썼기에 모욕의 고의를 인정했다. 굳이 법적 차원으로 가지 않아도, ‘-충’을 붙이지 않더라도, 한남이란 말 자체는 내게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를 일삼고, 가성비를 따지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능한 남성을 이르는 말이 하필이면 ‘한국 남성’이라니. 한남이라는 단어가 선량한 한국 남성까지 모두 묶어서 욕하는 것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거부감이 들었던 진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남으로 설명되는 특성에 내가 꼭 맞았고,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피하려고 했던 그 ‘한남’이란 말은 일부 이상한 남성을 보고 뭉뚱그려 일반화한것에 불과할까?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한남’들을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한남은 어디에나 있었다. 남중에서도, 남고에서도, 대학에서도, 남성들만 모여있는 어떠한 공간에서도 한남 문화는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다. 남성들만 모여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한남’은 존재했다.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를 단순히 일부 이상한 남성의 특성으로 치부할 수 없다. 한남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많은 한국 남성들의 버튼을 누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다들 한남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세대별로 보는 한남과 한남 부정

‘한남’이란 말을 들은 한국남성들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이라도 그들이 이상한 사람들일 뿐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또한 수많은 한남이 미투운동을 응원하지만 한남들 사이에 미투를 촉발시킨 문화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성희롱과 성폭력의 피해가 쏟아져 나오지만 한남은 “나는 아닌데? 우리는 그런 적 없는데?” 하며 발 뺌하기 급급하다. 그러나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여성혐오적 문화는 실재하며 수많은 혐오범죄와 성폭력은 이런 문화에서 탄생했다. 한국 남성의 여혐문화는 세대별로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 때문에 자신은 다르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나름의 분류를 통해 세대별 한남의 양상과 그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10. 낄낄대는 한남

 

10대 한남을 소개하는 걸 보며 “아니 뭔 10대까지 싸잡아서 후려치냐. 걔들은 어려서 그런 거야~” 라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내 유년 시절을 돌아봤을 때, 10대 한남 사이에서 소비되는 콘텐츠와 유행하는 언어에 여성 혐오는 너무나 명백히 만연해있다. 10대 한남들은 이러한 여성 혐오를 농담 삼아 주고받고 있다. “느금마”, “엠창”, “애미 없는 놈” 와 같이 어머니에 대한 욕설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어떤 욕설의 경우는 어머니를 끌고 와 성적으로 모욕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따먹고 싶다”, “주절먹(_주면 절하고 먹는다 ) ”먹버(_먹고 버린다)” 등 여성의 성을 언제든 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여혐표현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문제적인 지점은 이것이 그저 장난으로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여혐 문화를 만들어가는 10대 한남들은 자신들의 말에 담긴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재밌고 웃을 수 있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폭력을 가장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것 역시 다름 아닌, 웃음이다. 아무리 혐오적이고 폭력적이더라도 유머코드로 공유되는 순간 폭력은 장난이라는 이름 아래 슬쩍 숨어버린다. 여성 혐오가 유머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데는 인터넷 방송의 영향이 컸다. 10대 한남들 사이에서는 1인 방송이 유행하고 있고, 이중 인기 있는 BJ들이 주로 여성 혐오를 일삼는다. 인기 BJ 남들은 비싼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여성을 헌팅하는 방송을 하며 특정 여성들을 김치녀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향한 데이트 폭력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10대 한남은 자신이 습관적으로 말하는 여혐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지만 남들이 낄낄거릴 때 같이 낄낄거리며 즐긴다. 여혐은 10대 한남에게 하나의 놀이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레 여혐문화를 내면화한 10대 한남은 진정한 ‘한남’으로 거듭나게 된다. 10대 한남 문화는 정말이지 무해해 보이지만 사실 유해하다. 또래 여성 및 친구의 여성 가족 구성원에 대해 성적 대상화를 일삼던 그들은 그 말이 여성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들만 낄낄거릴 수 있으면 상관없었기 때문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대학교 남톡방 사건도 10대 한남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가해 남성은 그런 대학생이기 이전에, 그런 10대였다.

 

 

2030. 징징대는 한남

 

20대와 30대 한남은 징징거린다. 이 징징거림은 피해자인 자신을 ‘기득권’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 터져 나오는 것에 가깝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까지 생각하는데, 그 중심에는 군대가 자리한다. “남성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데, 여성은 하는 게 뭐냐?”,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챙기려 한다.”, “공무원 채용할 때 능력으로 뽑아야지 왜 성별 쿼터 보장하려고 하냐, 역차별이다”와 같은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한 2030 한남 래퍼는 노래에서 “야 그렇게 권릴 원하면 왜 군댄 안가냐”, “남잔 범죄자 x 같은 법 역차별 참아가며 입 굳게 닫고”와 같은 가사를 담기도 했다.

 

군대는 학업은 물론, 취업에도 걸림돌일 뿐이며, 18개월이라는 시간을 바쳐야 하는데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보상은 전혀 없다니. 남성은 이 사회의 진정한 피해자라는 식이다. 그렇게 자기연민에 빠진다. 그러니 자신을 ‘기득권’이라 비난하는 한남이란 호명에 억울해하는 것이다. 2030 한남에게 기득권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 관계 우위를 점한 ‘금수저’나 ‘재벌’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은 정말 피해자일 뿐, 기득권이 아닌 것일까? 지금 그들은 젠더권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득권을 상상하고 있다.

 

남성이 군대 때문에 취업 시장 진입 시기에 불이익을 본다고 해도, 취업의 어려움은 비단 2030 한남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세대라면 누구나 느끼는 문제다. 또한 사실상 취업시장에서 남성이 불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다. 지표상으로 사회로 진출하는 여남의 차이가 줄어들었다고 한들, 30대 이후 취업률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벌어진다. 경력단절 등으로 인해, 혹은 비정규직 노동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한편 재벌만이 기득권인 것도 아니다. 자본에 따른 권력 관계뿐 아니라 젠더권력 역시 존재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여성에게는 자본 권력과 젠더 권력이 이중, 삼중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경제력이 유사한 여남간 권력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2030 한남에게 기득권으로 여겨지는 직종에 종사하더라도 여성일 경우 성희롱과 성적 대상화에 쉽게 노출된다. 이렇게 2030 한남들은 10대 한남 시절을 거치며 바탕으로 깔아뒀던 여혐 위에 자신의 억울함을 엊어 여성의 목소리는 음소거해버린다. 한남들의 더 나은 ‘생활’이 중요하기에. 여성의 ‘생존’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40~. 엄.근.진. 한남

 

40대 이후의 한남들은 현세대보다 더 가부장적 사회에서 성장했으며, ‘가장’의 역할을 다해 가정과 국가를 일구어 냈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보수적인 시대 속에 살아온 것이 그대로 답습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지금이 과거보다 나아졌기에 더 이상 젠더에 따른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에 이들은 맨스플레인[각주:4]을 일삼는다. “꽃뱀 조심해라. 저 여자 빼먹을 거 다 빼먹고 나서 등쳐먹는 거다”, “요즈음 시대에 무슨 성차별이 있냐. 취업할 때도 아무 문제 없다”, “네가 아직 어려서 화가 많은 거다. 나도 어릴 땐 그랬는데 다 부질없다” 등의 맨스플레인. 10대를 거치며 갈고 닦은 여성 혐오와 2030를 지내며 여성의 목소리를 지운 유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을 가르치려는 경지까지 도달한다. 40대 한남은 정작 어떠한 가르침도 주지 못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 하나만큼은 잘한다.

 

한편 40대 한남이 일삼는 맨스플레인은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다. 어떤 때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위치에 공감하는 척하지만 어떤 때에는 이를 철저히 무시한다. 40대 한남은 과거 여성이 유리천장 때문에 사회로 진출하기 어려웠다고 말하며 현재는 과거와 달리 평등하다고 말한다. 한편 여성의 유리천장을 없었던 것처럼 말할 때도 있는데, 한남의 권위를 내세울 때이다. 지금 이렇게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남성의 ‘노력’과 ‘유능함’에 있다고 말하며 당시 여성이 마주했던 유리천장은 모른 척한다. 다시 말해, 한남의 권위를 세울 때는 여성이 겪은 차별을 지우며 현재의 불평등을 지우기 위해서는 여성이 겪었던 차별을 동원하는 것이다. 40대 한남의 맨스플레인은 이런 모순을 보인다.

 

한남이란 무엇인가

앞서 세대별로 한남의 특성들을 짚어보았다. 이제는 그 ‘한남’이라는 것을 규명할 때가 왔다. 다시 돌아와 질문을 던져보자. ‘한남성’은 남성성과 무엇이 다르고,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여태껏 살펴본 한남들의 특성을 봤을 때 단순히 남성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적극적이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정의되곤 하는 남성성과 억울함을 토로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으면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한남의 모습은 전혀 오버랩되지 않는다. 한국 남성에게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강요하는 맨박스[각주:5] 차원에서 존재할 뿐, 실제 한국 남성의 모습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남성은 남성성에 들어맞지도 않고 한남은 이를 추구하지도 않게 된 것일까?

 

근대에 등장한 남성성은 그 요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남성들 사이에는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은 여성과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의 남성은 두 가지 모두 충족하지 못했다. 먼저, 남성들 사이에 동질성을 가질 수 없었다. 한국 남성은 식민지국의 남성으로서 이등 시민일 수밖에 없었기에 공적 영역에서 제국의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또한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이 뚜렷이 구분되지도 않았다. 한국 남성이 자국 여성에 대한 지배와 통제의 권한을 제국의 남성으로부터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을 지배하는 위치를 점함으로써 한국 여성과 명확한 경계선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한국 남성은 ‘여성화된’ 남성으로만 존재했다.

 

‘무슨 일제시대 이야기를 지금까지 끌고 오냐’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 남성성은 분명 지금의 한남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불안정한 한국 남성의 위치는 식민지 시대에만 잠깐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해서는 용맹함으로써 그 위상을 잡으려 했으나, 상이군인이 되었다. 국가에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경제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후 발전을 거듭하며 한국 남성은 국가와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자리를 자처했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커짐에 따라 그 위치 역시 위협받았다. 비교적 최근에는 여성의 학력이 높아지고 능력이 개발됨에 따라 생계부양자로서 위치 또한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남성은 온전한 남성성을 갖추지 못하여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게 됐으며, 억울함을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이 토로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식민지 남성성은 기본적으로 ‘억울함’을 토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 위기 담론이다. 여성들의 학력이 높아지고 사회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남성의 입지가 줄어들었다와 같은 담론이 형성되기도 한다. 남성의 위기 담론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함께 가는 것처럼 비친다. 이는 또다시 한남의 억울함으로 돌아온다. 한편 남성 위기 담론은 전혀 위기상황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남성 권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기획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억울함은 ‘주변적 남성성’을 거쳐 밖으로 표출된다. 주변적 남성성은 남성 계급 내부의 정치, 경제적 약자의 남성성을 지칭하지만, 결코 그 자체로 약하지 않다. 남성문화 안에서는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만, 여성에게는 더 폭력적이고 강한 남성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성 혐오 범죄가 더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것 역시 한국 남성의 억울한, 주변적 남성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가부장적이고, 여성 혐오를 일삼고, 가성비를 따지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능한 한남은 이렇게 탄생했다.

 

빨간약을 먹은 한남이야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린 종종 ‘빨간약을 먹는다’고 표현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아가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무시무시한 진실을 알게 된다는,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다.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의 삶은 빨간 약을 먹고 난 후의 삶으로 불리곤 한다. 페미니스트가 되면 너무나도 평화롭게 보였던 세상이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갑갑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여남의 구분이 없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사람들은 실제로 그 후의 삶에서 분노나 슬픔을 더욱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빨간 약을 먹은 남페미의 삶은, 빨간 약을 먹은 여성 페미의 삶과 동일한 수준의 힘듦을 느끼지는 않는다. 여성이 페미니즘을 알게 된다는 것은 본인의 삶을 가두는 유리 벽을 직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남성이 페미니즘을 알게 된다는 것은 유리 벽 바깥에서 유리 벽 안에 여성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 페미니스트는 본인의 삶을 억압하는 것들을 마주하는 것이고 남성 페미니스트는 죄책감을 느끼는 정도인 것이다.

 

한편 남페미는 기득권으로 살면 되는데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이 힘들지 않느냐라는 질문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사실 빨간 약을 먹은 남페미의 삶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외부에서의 반응을 먼저 봐도 남페미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혀도 큰 문제를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생존형 페미/게이/버팔로라는 비아냥거림은 받을 수 있겠지만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꼴펨이라는 이유로 폭행에 노출되지 않았고 그럴 걱정을 한 적도 없었다. 안희정 사건, 곰탕집 사건, 몰카 규탄시위 등에서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같은 입장을 가져도, 같은 시위에 참여해도 신상이 털리거나 사진이 떠돌며 성적 대상화되지 않는다.

 

다른 쪽에서는 남성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에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조신할 것을 요구받는 것이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실은 별로 답답하지 않다. 지금까지 남성의 목소리가 곧 사회의 목소리였고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페미니즘을 통해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울려내고자 하는데 남성이 굳이 그 목소리를 앗아와야 하는지 의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단언할 정도로 내가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확실히 느꼈다. 다른 페미니스트와 같은 말을 해도 내가 말하면 비이성적인 잡음으로 치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친구가 내게 ‘똑똑한 선배와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까 꼴펨, 메갈이어서 연을 끊었다’고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떤 말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냐고 물어보았다. 그 말들은 내가 평소에 내뱉던 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나는 꼴펨이나 메갈로 불려지지 않았다. 연이 끊기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나는 종종 ‘자신과는 의견이 다르지만 나름의 소신이 있는 존재’로 대우받곤 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항상 한 마디씩 덧붙이더라. 네가 하는 페미니즘은 좋지만, 한국 페미니스트들처럼은 되지 말라고. 나도 그 선배와 다를 바 없는 한국 페미니스트인데 말이다. 한남 페미라는 이유로 대화의 상대로 인정받는다. 남페미의 삶은 이렇다.

 

다시, 한남에게

한남에게

 

지금까지 글에서 ‘한남은 ~~다’고 했지만, 사실 저 한남의 자리 대신 내가 들어가도 별 무리가 없을 거야. 지금까지 말한 한남은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건 사실 다 알잖아. 한남이란 말이 과격해 보일 수도 있어.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거리로 나와 외치고 울분을 토하는 여성이 모두 비이성적인, 광기어린 사람들이라 생각하기엔 이해가 안 되지 않아? 며칠 전에 발매된 산이의 ‘feminist’라는 노래에 우리 같은 한남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뭘까? 그 노래가 담은 가사는 내가 여태껏 말한 한남과 꼭 맞아 떨어졌고 실제로 한남에게 열렬한 관심을 끌었는데 말이야. 그 노래에 공감했다면 내 말도 한번 들어줘.

 

아마 지금 여성이 소수자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남이 많을 거야. 나도 실은 농담으로만 여성을 소비한다고만 생각했고 다른 문제는 없다고 믿어왔어. 그런데 우리가 모른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진 말자. 한남으로 살면서 몰카 찍힐 걱정을 한 적 없지. 화장실 구멍을 막은 적도 없고. 통금제한으로 걱정해 본적도 거의 없을거야. 애인과 헤어졌다고 해서 옛 애인으로부터 위협받을까 걱정한 적은 있니? 미투 운동에서 본 수많은 피해자들의 외침은 어떻게 생각해? 이것도 그냥 일부 한국 남성 때문일까? 그렇지 않단 걸 사실 우리 다 알잖아. 오히려 우리 한남은 우리가 해오던 여혐 문화가 폭로될까봐 걱정하지 않았어? “우리끼리 있으니까 이런 말하는거지, 미투 때문에 말도 편하게 못한다”는 말. 다른 한남 친구가 잘못하면 “미투각 잰다”는 말 한번 씩은 들어봤잖아. 사실 너도 불안할거야. ‘우리끼리’ 있을 때면 몸평, 얼평 서슴지 않지. 거기 너도 있었겠지만 아무 말도 안 했겠지. 그런데도 할머니, 할아버지 때만 불평등했다고 생각해? 한남으로 불리기 싫으면 한남으로 부르는 사람을 욕하지 말고 한남인 우리를 돌아보자.

 

물론, 너도 할 말 많겠지. 불평하면 찌질하다고 불리고, 힘들어도 버텨야만 한다는 압박이 들 때도 있었을 거야. 사실 맞아. 가부장제는 남성도 억누르지. 그런데 우린 왜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까? 혜화역에 여성이 수만명 모일 때, 왜 우리는 아무런 외침이 없었을까? 지금 이 현실이 한남에게 그리 불편하지 않단걸 알기 때문에 그런거 아닐까. 알바를 갈 때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짤리지 않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도 커리어를 이어가는데 무리없을 테니. 유교사상, 가부장제? 우리도 피해자긴 하지. 그런데 한남이 주도적으로 만들어갔던 건 부정할 수 없지. 정계를 가득 메운 것도 한남, 재벌 그룹을 쥐고 있는 것도 한남. System덕을 보고 system을 바꾸지 않지. “Blame system Not men?” No. “Against system Introspect ourselves!”

 

From 한남

 

얀 (hamin171.hm@gmail.com)

 


 

 

  1.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의 줄인 이름으로 사법부가 성 사건과 관련하여 무죄추정 원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고 판단하여 이를 규탄하고자 모인 단체이다. [본문으로]
  2. 곰탕집 사건은 지난해 11월 대전의 한 곰탕집에서 여성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남성 A씨가 기소된 사건이다. 피의자는 징역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청원 게시판에서 판결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청원글이 올라오며 화제가 되었다. [본문으로]
  3.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을 줄인 말로 남성 내부에서 가부장적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 작년에 시작된 단체로, ‘당당위’의 2차가해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최했다. [본문으로]
  4. 맨스플레인이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로,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5. 맨박스란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에게 씌워지는 억압, 즉 ‘남성이 남성다울 것’을 강요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성 강조는 여성성을 가진 남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기에 이 또한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