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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7호> 탈코르셋을 위한 변명_편집위원 472

by yonseiji 2025. 12. 20.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탈코르셋’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시오.” 올해 무려 미스코리아 도전자들에게 주어진 질문이었다. [각주:1] ‘탈코르셋’이라는 구호 아래, 화장품을 자발적으로 산산조각내고 이를 SNS에 자랑스레 인증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소위 ‘로리타 [각주:2] 적인 이미지에 대한 반발을 넘어, 단순히 짧은 치마와 ‘여리여리’한 옷들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보다 일상적으로는 불편한 여학생의 교복에 대한 일각의 불평과 시정요구가 탈코르셋이라는 이름으로 조명되기도 했다. [각주:3] 말 그대로 여성의 몸을 억죄는 각종 ‘코르셋' [각주:4] 에서 ‘탈피’하자는 탈脫코르셋 운동은 위의 사례에서 보듯 현재,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다.

그러나 이 흐름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반발과 비판 역시 꾸준하기 때문이다. “쿵쾅쿵쾅”과 같은 유구한 저급 조롱은 제쳐두더라도, 운동의 취지와 방향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와 함께 반감 또한 거세다. “왜 남자가 되려고 해?”, “왜 멀쩡한 여성성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거야?”와 같은 반응은 물론 “우리(남자)가 뭔 잘못?”, “하든 말든 관심 없는데 내 여자 친구만 안 ‘물들면’ 돼”처럼 우스운 말까지 종종 보게 된다. 물론 이들도 여자들이 화장이나 하이힐과 같은 코르셋을 벗어던져 편하고 건강해지는 것에는 굳이 별 반감도,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내 여자 친구가 아니면 상관없어’서인지 몰라도, 사실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단지 비판의 핵심은, 왜 여자들의 코르셋 얘기에 억울하게도 ‘남자’가 나오는지, 그리하여 왜 ‘남녀문제’임을 부각해 ‘남녀갈등’을 조장하는지, 다시 말해 왜 굳이 페미니즘인지다.

비판의 화살은 아예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기도 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들 사이에서도 탈코르셋은 극도로 의견이 갈리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의 강도와 방향, 나아가 실현 가능성과 바람직한 미래상을 두고 수많은 의견이 대립하며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구성한다. 예컨대 탈코르셋 운동은 단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들은 탈코르셋이 성폭력이나 임신중단권과 같은 여성 인권과 관련한 중차대한 핵심 문제들에 다소 빗겨있으며, 이를 위해 연대해야 할 여성들 간의 분쟁만 야기하는 불필요한 화력 분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또 여성의 코르셋을 벗겨낸다는 실현 불가능한 방식보다는 오히려 남성에게 코르셋을 씌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견해도 있다. 나아가 애초에 탈코르셋 운동의 취지 자체를 문제 삼기도 한다. 주로 ‘주체적 꾸밈’이나 ‘역逆코르셋’과 같은 키워드로써 두드러지는 이들의 견해는 ‘주체성’과 ‘자유’를 들어 탈코르셋 운동에 정면으로 대치한다.

이토록 논쟁적인 잡음들 가운데서 기어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탈코르셋 운동이 여성을 옥죄는 코르셋을 벗어나는 데 적확한 대응이라는 생각에서다. 코르셋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탈-코르셋이라니, 수사학적으로 너무나 당연해서 웃길 정도다. 하지만 그 당연함은 비단 수사에만 그치지 않는다. 탈코르셋을 둘러싼 위와 같은 논쟁들의 논리적인 알맹이를 솎아낼수록 우리가 계속해서 탈코르셋 해야 한다는 결론은 더 명확해질 뿐이었으니 말이다. 탈코르셋이란 게 대체 뭐길래 이 난리인지, 한 번 그 복잡한 속내를 까보자.



인간의 기본값을 향해

탈코르셋 운동은 단순히 파운데이션과 마스카라, 서클렌즈와 하이힐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긴 머리, 짧은 치마는 물론 조금이라도 ‘여성스러운’,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옷 일체를 문제 삼는다. 그 결과 우리의 바람직한 겉모습은 소위 ‘삭발과 절바지와 슬리퍼’, 다시 말해 ‘남자 같은’ 모습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따라서 이에 대해 ‘왜 남자가 되려고 하는지’, ‘왜 멀쩡한 여성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지우는지’ 따위의 불만 섞인 반응이 따라붙곤 한다. 더구나 왜 여자들의 탈코르셋 운동에 뜬금없이 남자가, 그것도 적대적인 관계로 등장하는지 역시 문제시되며 반감과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남자’가 되고 싶은 것 맞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단, 오로지 그 ‘남자’가 인간의 디폴트 값 [각주:5] 이라는 의미에서다.

영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 “Every man dies. -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예문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 생각난다. 인간man은 여자woman가 아니고,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맵게 다가왔다. 너무 비약인가? 그럼 다시, 여자는 인간 ‘플러스알파’다. 인간의 기본값인 남자에다 무언가를 덧칠해야만 하는 존재다. ‘Wo-man’, ‘fe-male’, ‘그-녀’ 등, 사실 언어 차원에서 이러한 진술은 매우 익숙하다. 『이갈리아의 딸들』 [각주:6] 에서 여성이 움wom, 남성이 맨움manwom으로 설정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고 날카롭다. ‘남중생’, ‘남고생’, ‘남대생’, ‘남선생’, ‘남교수’, ‘남의사’, ‘남사장’, ‘남기자’와 같은 말이 인지적으로 돌출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선생’, ‘교수’, ‘의사’, ‘사장’, ‘기자’ 모두 이미 디폴트가 남성인데 또 ‘남-’을 붙이니 마치 ‘역전 앞’처럼 불필요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일 테다.

 

 

진저브레드 '우맨'



그런데 언어 관습은 현실의 한 가지 반영일 뿐이므로, 이러한 경향은 언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기호와도 밀접하게 얽혀있다. ‘Wo-’와 ‘fe-’, ‘-녀’와 ‘여-’가 언어적인 덧칠이라면, 일상생활 차원의 덧칠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코르셋이다. 화장실 표지판의 형상을 떠올려보자. 여자를 표현하려면 남자의 형상에 양쪽 삼각형으로 치마를 덧붙여 넣으면 된다. 쿠키를 만들 때도 진저브레드 ‘맨’의 여자 버전을 만들고 싶으면 속눈썹과 리본을 붙이면 된다. 마찬가지로 같은 모양의 팬티에 리본과 레이스를 달면 ‘여아용’이 되는 기적이 발생한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형에 긴 머리, 속눈썹과 립스틱, 레이스와 리본을 달면 비로소 여자가 된다. 구조 속의 개체는 차이를 통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남자와의 차이, 즉 남자에 덧붙여지는 코르셋이 결국 사회가 여자를 규정하는 핵심기호인 셈이다.

따라서 코르셋은 필연적으로 위계를 암시한다. 기본형이 아닌, 무언가가 덧붙여져야만 가능한 존재란 그 자체로 부차적인 2등 시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지와 치마, 짧은 머리와 긴 머리는 절대 동등한 대립 관계에 놓일 수 없다. 스타일 A와 스타일 B가 아니라 기본형 A와 변형 A'의 차이라는 말이다. 그 위계의 흔적은 일상생활 속 감정적인 차원에서 흔히 엿보인다. 예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여장이랍시고 화장과 가발, 드레스를 걸치고는 이를 벌칙으로 여기는데, 그 우스꽝스러움에 깔깔대며 조롱하고 괄시하는 모습에서 코르셋에 대한 그들의 감정적 태도가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알 수 있다. ‘여자는 꾸미는 시간이 필요하니 남자들은 여자 친구가 늦어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와 같은 문구가 로맨틱하고 귀여운 연애서사로 떠도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뚜렷하게 읽히는 것은, 꾸밈은 사사로이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므로 너그러이 배려해야 한다는 남자들의 시혜적인 자의식과 거기에 장단이 맞춰진 여자들의 얄팍한 만족감이므로. 우스꽝스러움, 사사로움,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이 여자에게 씌워진, 그리고 그들 스스로 쓰는 코르셋의 알맹이다.

이래서, 코르셋 얘기에 남자가 나오는 거다. 코르셋을 입지 않은 기본형이자 인간의 기준이 되는 남자와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탈코르셋이란 리본을 달면서 비로소 정의되었던 여자의 범주와 의미 설정을 거부하고 동등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리본을 뜯어냄으로써 남자와의 격차를 꾸준히 의식하고 좁혀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남성을 적대적인 관계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이처럼 기호상의 얘기지, 칼을 겨누고 싸우겠다는 게 아니다.



신체의 자유와 경제적 권력, 딱 남자만큼만
 
그런데 코르셋의 악영향은 이처럼 감정적인, 개념적인 위계에 그치지 않는다. 코르셋은 단순한 기호 이상의 실질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현실 삶을 억죄는데, 그 핵심은 바로 불편함이다. 허리가 가늘어 보이게 하려고 장기가 터질 정도로 허리를 조르는 코르셋의 악명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 크고 귀여운 눈동자를 위해 산소투과율이 낮아 눈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는 서클렌즈를 끼고, 붉고 아름다운 입술을 위해 중금속이 들었을지라도 입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립스틱 바르기를 마다하지 않고, 예쁜 가슴 모양을 위해 림프의 흐름을 막고 암 발병률을 높이는 와이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 아는 코르셋의 악영향이다. 하지만 더욱 정신이 확 드는 지점은 코르셋이 이처럼 건강 손상이라는 적극적 차원의 불편함을 넘어 소극적으로, 그러나 교묘하고 효과적으로 여성의 본질적인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의 자유는 모든 인권의 시작이자 본질이다.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다른 모든 자유도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한 우리 헌법처럼, 세계 각국의 법에서 신체의 자유를 중요히 다루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러나 2등 시민 아니랄까 봐, 그것은 여성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법리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건 아니다. 단지 개개인의 사고방식이, 미디어가, 가부장제가, 여성 혐오적인 사회구조가 저 깊은 의식의 심해에서 여성의 신체적 자유를 은밀히 제한한다. 그리고 이는 바로 코르셋을 통해 실현된다.

당장 아침에 타고 온 지하철 풍경만 떠올려도, 쩍 벌린 바지들과 대조적으로 꼿꼿이 다리를 모은 치마들이 몇 트럭은 지나쳐간다. 핫팬츠와 잘록한 블라우스를 입고는 스트레칭도 편하게 할 수 없다. 하이힐을 신고서는 제대로 뛰기는커녕 교육관 옆 오르막길을 오르기조차 쉽지 않다. 예쁜 숄더백을 매는 대신 한쪽 팔의 부자유는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아이라인과 눈썹이 번질까 봐 눈도 마음대로 비빌 수 없다. 파운데이션이 지워질까 코도 아무렇게나 편하게 못 풀고 미세먼지 마스크도 조심스레 껴야 한다. 심지어 립스틱이 지워질까 봐 숟가락도 조심히 조준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익숙함과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름으로 굳은살처럼 박혀 여성의 신체적 자유를 가장 겉껍데기부터 야금야금 제한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는 까딱 몸을 잘못 놀렸다간 먹히기에 십상인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기에 고작 구두 하나, 하의 하나, 화장품 하나는 매우 사소해 보인다. 지금 당장 물고기를 사냥하거나 곰과 마주쳐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닌 이상 좀 불편해도 뭐 어때, 예쁘잖아.

그러나 그 제한된 행동반경이 매일매일 쌓이고 쌓여 실제로 온몸의 근육에 새겨지리라는 걸 안다면, 그렇게 ‘예쁘다’며 쉽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언제 밟아야 하는지, 안장의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커브 길에 허리를 얼마나 기울여야 하는지를 의식하고 타는 사람은 없다. 손에 익은 피아노곡을 칠 때도 조표와 임시표, 페르마타와 다카포를 하나하나 의식하며 연주하지는 않는다. 계산하고 떠올리지 않아도 어느새 내 몸이 직접 세세한 지시사항을 기억해 스스로 가동범위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코르셋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아찔한 항공 사고가 날 때마다 우리나라 승무원의 복장 이야기가 나온다. 매일 높은 구두, 폭이 좁은 치마, 팔도 들어 올리기 힘든 블라우스와 재킷을 입는 그들이 과연 위급 상황에서 바로 습관화된 딱딱한 굳은살을 떨치고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승무원의 경우로만 한정 지을 일이 아니다. 멀쩡한 내 다리를 옷 때문에 60도까지밖에 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릴 때마다 여간 소름 끼치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모아진 무릎과 뛰기 힘들어진 발의 경험은 근육에 고스란히 남아 중요한 순간에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뒤처지게 만들 것이다. 결국 코르셋은 외적인 것이지만, 단순히 피상적인 껍데기에 대한 일로 축소될 수 없다. 가장 본질적인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여 미래의 가능성을 좁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모르는 새 서서히. 유리병에 갇힌 벼룩의 일화를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원래 병의 높이보다 훨씬 높이 뛸 수 있는 벼룩이 있었다. 그런데도 매번 병 꼭대기에 부딪히는 일이 반복되자, 이내 병 밖에 나와서도 병 높이까지밖에 뛸 수 없게 되었단다. 여기에 코르셋에 갇힌 우리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아나운서가 안경을 쓴 것으로 화제가 됐다.” [각주:7] “근데 어쩌라고? 이게 뭐?”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 이상한 문장은 ‘아나운서’ 앞에 ‘여자’만 붙이면 곧 자연스러워진다. 여자 아나운서가 안경을 썼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므로. 그런데 여기서 ‘불편한’ 렌즈를 벗고 안경을 썼다는 사실 자체에만 주목해선 곤란하다. 핵심은 ‘남자 아나운서가 쓸 필요 없는’ 불편한 렌즈를 벗고 ‘남자 아나운서에게만 허락되었던’ 안경을 썼다는 그 맥락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불편함을 잣대로 삼는 것은 탈코르셋의 진짜 맥락을 흐린다. 예컨대 코르셋은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며, 남성도 연애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각종 불편함을 억지로 감수해야 한다면서 탈코르셋의 여성주의적 함의를 부정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탈코르셋에 대한 대항마로 ‘탈脫갑옷’ [각주:8] 이라는 신조어를 내미는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경쟁이란 동등한 기반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초등학생과 대학생의 글쓰기 대결을 아무도 경쟁으로 치지 않는 까닭이다. 나와 수지가 연애 시장에서 겨뤄 내가 도태되는 것은 다분히 정당한 경쟁일 수 있다. 하지만 S라인 몸매와 초콜릿 복근은 절대 대등하지 않다. 단순히 두 성별의 생물학적 차이라고 넘길 수도 없다. 힘세고 건강한 남자의 복근에 비해 여자의 가녀린 S라인 몸매는 굶고 보형물을 넣고 심지어 근육이 생길까 봐 조심하는, 건강과는 거리가 먼 극단적인 신체의 부자유를 통해서만 획득되기 때문이다. 몸매를 비롯해 헤어스타일과 패션 등 일체의 치장이 유독 여성의 경우 남성에 비해 극단적인 자기착취를 향하는 것, 이를 단순히 우연이나 정도의 차이로 치부하는 것은 기만이다. 탈코르셋의 핵심은 이처럼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중립에 가려진 여성 혐오의 맥락을 의식하는 데 있다. 이 운동이 명백히 페미니즘인, 페미니즘이어야만 하는 이유다.

한편 더욱 심각한 것은, 코르셋이 실질적인 경제적 부담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한두 달에 한 번쯤은 빈 파운데이션 통을 갈아줘야 하고, 세일 때마다 립스틱과 아이라이너도 사줘야 한다. 철마다 바뀌는 유행 따라 블라우스와 원피스도 구입해줘야 하고, 또 미용실 갈 때마다 돈은 왜 이렇게 많이 드는지. 더구나 지출은 지출을 부르기 마련이다. 화장을 제대로 지우려면 리무버와 화장 솜도 다달이 사야 하고, 섀도와 블러셔를 잘 바르려면 고오급 브러시도 필요하다. 속옷이 보이지 않게 스킨톤의 나시와 속바지도 구비해야하며, 탱탱한 컬과 머릿결을 유지하기 위해 트리트먼트와 헤어 에센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 모두는 여성의 일생에 걸쳐 계속되기에 결코 사소한 지출로 치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또다시 남성이 적대적인 관계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위의 모든 것은 엄밀히 얘기해 ‘남성은 경험할 일조차 없는’ 경제적 부담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성별 간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코르셋을 향하도록 설정된 여성의 욕망은 이미 현저한 경제적 권력의 격차를 더욱 벌린다. 이는 가부장제의 공고화와 맞닿아 있기에 해롭다. 탈코르셋이 페미니즘의 핵심 의제여야만 하는 또 다른 까닭이다. 그래서 말인데, 정정하겠다. 사실 칼을 겨누고 싸우려는 것 맞다. 이에 억울한 남성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살면서 한 번도 코르셋을 뒤집어쓴 여성의 이미지를 숭배하거나 성적 대상화 해보지 않은 남자가 우주 어딘가에 하나쯤은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더구나 여성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그럴지라도, 핵심은 남성이 이 구조의 절대적인 수혜자라는 데 있다. 유니콘 [각주:9] 으로 거듭난 남성이라 한들 그들 역시 코르셋의 수혜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코르셋으로써 깎여 먹은 여성 몫의 경제적 권력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코르셋 문제에 있어 기득권인 남성의 무지와 무관심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온전한 신체의 자유와 함께 누려야 할 경제적 권력을 마땅히
향유하는 남자, 아니 인간 말이다. 치마를 벗어 던진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의미다.



주체적 코르셋은 없다
 
탈코르셋과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주체성과 자유의 문제다. 소위 ‘주체적인 코르셋’, ‘코르셋을 입을 자유’는 탈코르셋 운동의 논리 전개에 급제동을 건다. 화장과 긴 머리가 여성에게 신체적 불편과 경제적 부담을 안겨준다고 해도, 만약 한 여성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이라면 그것은 개개인 저마다의 만족감에 대한 사사로운 기회비용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코르셋은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면 되는 선택의 문제이기에, 구조 속 개인의 주체성을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탈코르셋을 외치는 것은 도리어 여성의 꾸밀 자유를 억압하는 ‘역코르셋’이 된다. 결국 이러한 논리 하에서 코르셋은 구조적 맥락을 잃고 사적인 취향의 문제로 축소되므로, 코르셋을 구조적인 여성 혐오라고 보는 탈코르셋 운동의 기본 전제부터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주체적 코르셋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주변의 귀납적인 사례들을 한 번 총동원해보자. 엄마, 아빠, 언니/누나, 오빠/형, 여/남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초등학교 동창, 대학 동기, 고등학교 은사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택시 기사, 경비 아저씨 등등. 그 모든 무작위적인 점들을 좌표평면에 표시하면, 반드시 하나의 함수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왜 특정 성염색체를 가진 이들만 하필 주체성이 꾸밈이라는 형태로 발현되는지, 왜 그들의 꾸밈은 유독 극도로 자기 착취적인 지를 말이다. 그 모든 게 우연일 수는 없다. 분명히 하나의 선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그래프를 서로 다른 자유로운 점들의 집합이라며 우기는 것은, 한 톨의 자유라도 억압되는 꼴은 못 보겠는 숭고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냥 선을 긋기 싫은 마음의 유치한 합리화에 가깝다. 코르셋 논의에서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구실로 구조를 흐리는 것은 이처럼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이 구조를 아예 무시한 채 코르셋의 온전한 주체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경우는 많지 않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여성 혐오의 구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는 이들이기에, 구조적 억압이 개인의 행동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적 코르셋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코르셋이 여성 혐오적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되, 그 틈새에서 주체성의 가능성을 찾는다. 즉 현재의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 통용되는 기호를 비틀고 전유하여 도리어 구조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이 발휘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남자들이 싫어하는’, 혹은 ‘남자들 기죽이는’ 기 센 ‘환불화장’ [각주:10] 과 ‘쥐 잡아 먹은듯한’ 빨간 입술, 그리고 수동적인 로리타와 대조되는 적극적으로 섹스어필하는 옷차림은 남성의 기대 어린 시선에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으려는 주체적인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 꽤 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에서건 광고 문구에서건 거부감 없이 쓰이던 “남자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남친 마음 사로잡는 청순한 투명 메이크업” 따위의 기분 나쁜 문구들에 직격타가 될 것이다. 남자들이 안 좋아하는 “그런 거”만 골라서 하고, 화장한 티 팍팍 나는 성숙한 화장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동적이고 무해한 여성상을 찬양하는 여성 혐오적인 코르셋의 구조하에서, 그와 반대되는 기호의 코르셋을 끌어다 전유하는 것은 충분히 주체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바로 성적 대상화를 저격할 만큼의 근본적인 타격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코르셋을 주체적으로 전용하겠다는 위와 같은 전략에는 유구한 성녀 대 창녀의 이분법이 그대로 투영되어있다. 여기서 성녀는 성적 무지와 정숙이라는, 창녀는 성적 개방과 음란이라는 가치를 함축한다. “오빠가 좋아하는 청순 메이크업”은 남자들이 숭배하는 여성의 속성인 정숙함에, “남자들 기죽이는 걸크러시 메이크업”이나 “센 언니 메이크업”은 남자들이 혐오하는 여성의 속성인 음란함, 정확히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적 자기표현에 해당할 테다. 결국 위의 전략은 의도적으로 음란함을 택함으로써 여성에게 끊임없이 정숙함을 강요하는 구조적 억압에 저항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녀와 창녀는 동전의 양면으로, 성적 대상화의 두 이름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녀 숭배와 창녀 혐오는 여성을 타자화한다는 측면에서 사실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여성은 매 순간 성녀 아니면 창녀로 존재하며, 여성에 대한 성적 타자화 그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이상 성녀도 창녀도 아닌 채로 있을 수 있는 시공간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겨눠야 할 것은 거대한 성적 대상화의 구조 자체이지, 고작 성녀 혹은 창녀라는 이름표가 아니다. 진정한 주체성이란 성녀 프레임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녀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성녀도 창녀도 되지 않을 권리다.

그러므로 주체적 코르셋이라는 이름으로 구조 내부에서 기호를 전유하는 것으로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주체성만 발휘할 수 있다.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상에 연연하지 않으며 외려 ‘남자들이 싫어하는’ 기호를 끌어와 나를 치장하는 것은 분명히 어느 정도 주체적인 일이다. 하지만 기존의 기호를 활용한 주체성이란 모래성과 같다. 구조 내부의 기호는 그 자체로 구조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의미의 조각이므로, 그 너머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항상 도구로서 머물 뿐이다. 다시 말해 남자들이 싫어하는 코르셋이라 할지라도 이미 남성의 시각에서 구조화된 기표이기에, 결코 구조 바깥으로 나아가 성적 대상화의 권력 구도 자체를 겨냥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체적 코르셋이란 착취적인 구조 내부를 빙글빙글 ‘주체적으로’ 도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안경 쓰고 삭발하고 절바지를 입어 ‘남자처럼’ 되려는 탈코르셋 운동 또한 여전히 구조 내부의 남성성의 기호를 차용한 것 아니냐는. 즉 ‘강인하고 멋있는’ 것으로 통용되는 남성성을 여성성보다 우월하게 보아 그 모습을 좇으려 하는 ‘여자 마초’가 아니냐며, 주체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탈코르셋은 단순히 남자의 표현형을 취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포인트는 남자와 ‘같아짐으로써’ 차이를 무력화하고, 그로써 구조 자체에 균열을 내려는 것이다. 구조는 차이로써 성립하므로, 대상화의 근거인 차이가 옅어질수록 그 구조에 금이 갈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2013년 일본의 여자 아이돌 AKB48의 한 멤버가 남자 연예인과의 스캔들이 터지자 자진하여 삭발함으로써 팬들에게 사죄한 일이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었다. [각주:11] 그러나 물리적인 표현형이 자발적인 삭발이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올해 ‘혜화역 시위’12에서의 삭발이 표명한 탈코르셋의 기치와는 거리가 멀다. 전자는 정숙하지 못한 데 대한 남성 팬들의 징벌적인 시선을 내면화한 것으로, 오히려 여성 혐오의 구조를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르셋을 판단하는데 어떤 실루엣인지, 레이스가 얼마나 달렸는지, 치마는 얼마나 짧은지, 얼마나 여성스러운지는 실은 모두 사족이다. 오로지 핵심은 남성과 얼마나 차이 나는지, 그리고 그 차이를 없애 구조를 겨냥할 의지가 있는 지다.

요컨대, 주체적 코르셋은 없다. 구조 속에서 기호의 온전한 주체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적으로 아름다울’ 수는 없는 우리지만, 그 아름다움의 구조를 넘어서 ‘주체가 될’ 수는 있다. 탈코르셋은 주체적 꾸밈, 꾸밀 자유라는 허상을 넘어 코르셋의 구조 바깥을 직시하고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최적의 전략이다.



탈코르셋, 가장 일상적인 연대
 
인터넷 기사를 둘러볼 때면 내가 돌출된 존재임을 여실히 느끼곤 한다. ‘운전미숙으로 앞 차량을 들이받은 A 씨(nn세, 여)’를 비롯해 무수한 ‘□□녀’들은 물론, 심지어는 성폭력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이름을 떡하니 박은 ‘○○○ 미투’까지, 여성은 집요하게 돌출된다. 여성 배우의 노출이 당당히 흥행요소로 기획되는 것, 여기저기서 그 배우의 이름을 단 ‘△△△ 엑기스’가 떠돌아다니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여성이 말초적인 흥미의 도구로 대상화되는 모습에서, 코르셋을 덧붙임으로써 인간에서 여자로 돌출되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려나. 메갈리아의 전신인 메르스 갤러리에서 처음 ‘남혐’ 발언이 터져 나올 무렵 남성들의 반응을 생생히 기억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저런 말을 하는 게 여자일 리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여자란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이후 언젠가 임신중단 합법화 시위현장 사진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사진 속 여성들은 짧은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에 ‘남자가 저런 걸 왜 하냐’, ‘아니야 저거 여자야’, ‘헐 여자가 왜 저래’, ‘무섭다’와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거기서 실마리를 봤다. ‘발칙하고 기센’ ‘여자’가 아니라, ‘무서운’ ‘인간’을.

물론 현실의 벽은 막강하다. 미디어는 연일 더욱 예쁘고 더욱 마르고 더욱 기괴한 코르셋을 전시하는 동시에, 여자에겐 그저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임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근하게 드러낸다. 뷰티 업계는 또 어떤가. 뷰티Beauty는 건강Health의 동의어가 된 지 오래고,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혹은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는 심리를 조장해 코르셋을 극단으로 내몬다. 최근 들어서는 페미니즘을 어설프게 의식하며 ‘화장으로 단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하자!’, ‘사회의 기준을 벗어난 나만의 개성을 되찾자!(물론 화장으로)’ 따위의 기만적인 문구를 내걸고는 이전과 달라진 건 포장뿐인 상품을 그대로 팔기도 한다. ‘획일적이지 않은 나만을 위한 성형’, ‘스타일리시한 탈코르셋 커트’는 말해 뭐하랴. 이러한 미디어와 기업의 폭격 아래서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기는 분명 쉽지 않을 테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수지처럼 엄청난 미인이었다면 칭송받는 사회적 자산을 포기하고 탈코르셋 운동에 쉬이 동참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만약 재력, 학력 등 다른 자산 없이 오로지 아름다운 외모뿐이었다면? 안 그래도 여성이기에 취약한 사회적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르는데? 또 내가 연예 지망생이나 미용업계 종사자였다면? 코르셋을 강요하는 직장에 내 생계를 연명하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탈코르셋이 생존권의 박탈과 맞닿아 있기에 실천하기 힘든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이는 여성들의 다양한 현실적 제약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유효한 지적이다. 탈코르셋 운동이 우려 섞인 비판을 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성 개개인의 다양한 현실을 포괄하지 못하기에, 동원이 필수적인 사회운동의 특성상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연대와 지지가 필요하다. 미디어와 뷰티업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코르셋의 구조는 분명 개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만, 개개인의 선택만이 이를 조금씩이나마 바꾸어갈 수 있다. 더불어 각자의 환경에 따라 탈코르셋 실천의 기회비용 또한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렇다고 합리화에 안주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것은 나에게 좋을 뿐 아니라, 코르셋을 벗어도 괜찮은 사회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외모가 유일한 사회적 자산이 아닌 이들의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외모가 유일한 자산인 여성들의 고통 또한 덜어질 수 있다. 코르셋을 강요하지 않는 직장에 다니는 이들의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코르셋을 강요받는 직장인 여성들의 억압 또한 느슨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각자의 상황에 맞추되, 불편의 역치를 최대한 바짝 낮추어 행동에 나서야만 한다.

처음 탈코르셋을 결심했던 계기를 떠올려보면, 별로 친하지도 않은 한 여성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내가 속한 집단에서 유일하게 맨얼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나는 충격받았었다. ‘화장하지 않아도 별일 안 생기는구나’, ‘나도 화장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저 애가 하는 걸 나라고 못 할 게 뭐람?’, ‘왜 내가 여태 이 생각을 못 했지?’라면서. 단 한 명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큰 용기를 얻었다. 뒤집어보면, 나 하나의 사소한 실천 또한 누군가에게는 지대한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 보면, 연대의 장을 한없이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거울 앞에 선 당신의 일상적인 선택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유다. 그 사소함이 모여 구조를 바꿀 힘이 되어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탈코르셋이란 이처럼 사소한 변화로 꾀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연대가 아닐까.

간혹 후퇴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 화장을 안 한 지 1년이 되어가지만, 사진 찍을 때나 발표할 때는 종종 틴트를 바르곤 했다. 안경을 쓰면 ‘못생겨 보이니까’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은근슬쩍 렌즈를 꼈다. 저번 달에는 홀린 듯이 로드샵에 들어가 쓰지도 않을 라벤더색의 블러셔를 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절대 억압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30분 만에 등교 준비를 마치고, 마음대로 눈을 비비고, 하얀 셔츠를 입은 채 팔 베고 자고…. 이 사소한 변화들은 모두 그 자체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조금씩 후퇴할지언정 이전처럼은 절대 돌아갈 수 없음을 내 몸이 직접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죄책감은 오히려 즐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징후니까. 그렇게 시나브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여남이 동등한 인간인, ‘주체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서두에 언급했듯 코르셋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있음을, 나 역시 현실적으로 그 스펙트럼 속 하나의 색깔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탈코르셋 하는 ‘진짜 페미’, 코르셋 전시하는 ‘가짜 페미’를 무 자르듯 나누고, 다짜고짜 화장품과 치마를 버리고 삭발을 하라며 강요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이제는, 적어도 주체적 코르셋이라는 합리화는 지양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비록 각자의 색은 다를지라도 탈코르셋을 향해 서로 연대하고 지지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코르셋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든, 우리가 여성 혐오의 구조에 맞서기 위해 함께 서 있다는 건 분명하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디쯤 서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이면, 가장 빨갛고 선명한 색이 당신에게 물들기를 바란다.

472 (rooibos17@naver.com)

  1.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올해가 공식사과 적기”, 한국일보, 2018. 3. 6. [본문으로]
  2. 현 한베평화재단(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이사인 구수정 박사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이다. [본문으로]
  3. 메모리얼이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기억하기 위한, 혹은 추도를 목적으로 만든 물체, 공간, 시간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4. 「한국의 베트남전쟁 기념과 기억의 정치」, 『사회와 역사』 제 86, 한국사학회, 2010, 171p. [본문으로]
  5. 지금은 해체된 모형으로, 베트콩을 무릎 꿇린 모습에서 한국군의 용맹성만을 강조했던 모형이다. [본문으로]
  6. 앞의 글, 172p. [본문으로]
  7. 앞의 글, 150p. [본문으로]
  8. 여자는한 끼식사, 남자는 바로 쏴 죽였다”, 프레시안, 2015. 4. 7. [본문으로]
  9.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일컫는 말이다. 라이(Lai)오다.’의 의미를 가진 한자의 베트남어로 경멸조로 혼혈을 부를 때 사용하며, 따이한(DaiHan)은 한자大韓으로 한국인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대중매체에 표상된 베트남전쟁과 젠더 이데올로기-1964~1973년 선데이서울, 여원을 중심으로」, 『국제문화연구학과』, 2017. 2, 79p. [본문으로]
  11.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1968 2 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이 죽은 전쟁범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