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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6호>서울, 그놈의 서울_편집위원 지민

by yonseiji 2025. 12. 19.

 

모름지기 사람은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들으며 자랐다. 모두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올 때, 경주에 살던 나의 수학여행 행선지는 언제나 서울이었다. 예쁘게 꾸며진 인사동을 거닐면서, 서울에서 제일 사람이 많다는 명동을 다니면서, 나는 반드시 서울에 오고 말겠다 다짐했다. 경주에도 작은 서울이 있었다. ‘명동 의류’, ‘서울사진관’ 등등 각종 상표에 ‘서울’이 붙어있었다. 상표 속의 ’서울‘은 해당 분야에서 프리미엄을 다는 것처럼, 뭔가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다시 한번 모름지기 사람은 서울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며 자랐다. 가끔은 감히 서울의 인프라를 누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어쩌다 서울에 열리는 콘서트에 가려고 하면 왕복 다섯시간을 ktx에서 보내야 했다. 억울하기보다는 그저 서울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야말로, 서울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온 세상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내 고향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역대 유례가 없던 강력한 지진이 났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제대로 보도조차 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했다. 우리의 일상은 뒤흔들렸는데, 보도국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규모 5.8의 지진이 경주를 흔든 지 30분이 지날 무렵에도 9시 드라마는 멈출 줄을 몰랐다. TV는 안 되겠구나 싶어 켠 인터넷에서는 오히려 생뚱맞은 ‘서울 지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상을 잃어버린 20만의 경주시민보다 작은 진동을 느낀 서울 천만 시민의 공포가 더욱 강력했던 것이다. 같은 해 서울의 폭염이 9시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과 비교되며 부실보도 논란이 있었지만, 이 역시 한때뿐이었다. 그때 내가 사는 지역은 철저히 관심 밖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이미 서울을 중심으로 촘촘히 디자인된 이 세상에서 내가 택할 수 있었던 건 다시 한번 상경(上京)을 결심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구조보다는 그저 나 한 명, 개인의 처지가 변하는 게 간편하니까 말이다. 내가 느꼈던 억울함과 속상함은 곧잘 방향을 틀어 서울을 향한 동경으로 변하곤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반드시 서울로 대학을 오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서울에 오게 되었다. 서울은 내 예상보다도 엄청난 곳이었다. 서울내기 석 달 차가 될 무렵, 상암에서 우연히 유시민을 보고, 신촌 영화관에서는 TV 속 연예인을 만나기도 했다. 지나가다 유명인을 볼 수 있다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더 놀라웠던 점은 이 세계에서만큼은 ‘즉흥적’으로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많은 준비 기간을 필요로 했던 지방에서의 문화생활과 달리, 여기서는 저녁에 연극을 보러 가는 걸 점심에도 결정할 수 있으니까. 서울에서 문화생활을 누리는 재미에 빠져 한동안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다니고, 특별전이 열릴 때면 예술의 전당을 기웃거렸다. 심지어 지금은 주민등록상 주소지마저 서울로 바꾼 상태다. 서울을 동경하던 경주시민이 그야말로 서울시민이 된 셈이다.

 

 

​내겐 너무나 폭력적인 서울

 

하지만 서울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난 어디까지나 지방 출신 거주자에 불과했다. 그게 티가 났다. 내 말투에서, 지하철을 타는 나의 어리바리함에서 사람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어디서 왔냐고 묻곤 했다. 그리고 역시 그 사람들은 내 상상 속 ‘서울 사람들’ 그대로였다. 그들의 말투에서, 오만한 태도에서 티가 났다. 그들은 나를 무슨 순수한 지방 소녀쯤으로 여기곤 했다. 지방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서울 중심주의가 나를 그저 속상하게 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내가 서울에서 직접 경험했던 서울 중심주의는 억압하는 폭력에 가까웠다.

 

# 명백한 폭력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에겐 술자리가 잦았다. 나는 여럿이 어울려서 술 마시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했던 술 게임도 꽤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유독 맥을 못 추는 게임이 있었는데, 바로 ‘지하철 게임’이었다.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BGM이 울려 퍼질라치면 제발 내 차례가 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나마 내가 소속한 과는 지방 출신 새내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지하철 게임을 지양했지만, 언제나 그 속에서 보호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배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자체로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나 하나 모른다고 그 게임이 중단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서울은 전국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서울에 대해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했다. 막 상경한 사람들은 입도 뻥긋 못하고 서울의 질서에 순응하면 되는 구조였다. 구조 앞에서 무력해진 개인, 즉 한낱 상경한 경주사람인 나의 선택지는 너무나 협소했다. 술자리에서 몇 번의 속앓이를 한 후, 나는 지하철에 탈 때 노선도를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서울 사람들이 무려 이십여 년에 걸쳐 체화한 지식을 1년 만에 벼락치기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지방 사람들이 녹아 들어가기에 서울의 질서는 너무나 견고했다.

 

서울 중심주의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공기처럼 녹아있었고, 지방 비하 발언은 번번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동기들은 종종 지방에 ‘내려가’고는 했다. 나조차도 경주에 ‘내려가’곤 했지만 지방이 보통 서울에 비해 위도가 낮으니까 그렇게 말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위도가 같은 송도나, 심지어는 높은 가평에 갈 때도 언제나 내려간다고 표현했다. 그에 반해 서울은 언제나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존재였다. 상경(上京)은 지독히도 권력적이고 정치적인 언어적 표현이다.

 

또한, 서울 사람들은 가끔 순진한 눈을 하고 “너희 동네에도 이런 거 있어?”하고 물어보곤 했다. 주로 ‘지하철’이 있는지, ‘버거킹’ 같은 프랜차이즈가 있는지 같은 것들을 궁금해했다. 사실 이 얘기는 지방 출신 친구들과 만나면 항상 반복되는 하소연이다. 한 부산 출신 친구는 부산에도 있을 것 다 있는데 수도권과 멀다는 이유로 없을 거라 가정해버리는 서울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글쎄, 나는 달랐다. 나는 그들의 예상이 실제로 정확해서 더욱 속상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질문하는 너희도 이런 거 있어? 의 ‘이런 거’가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없고, 버거킹 없고, CGV는 이제 짓는다고 말하기가 가끔은 부끄러웠다. 

 

​# 교묘한 폭력

 

지방 비하 발언도 나를 힘들게 했지만, 사실 나를 더 괴롭게 했던 것은 그들이 지방에 대해 갖고 있던 이상한 환상이었다. 여느 때처럼 미세먼지로 괴롭던 날, 한 친구가 내게 ‘너는 공기 좋은 동네에 살아서 좋겠다’며 말을 건넸다. 지방이면 미세먼지가 없고, 공기가 맑을 것이라는 ‘공기 좋고 물 좋은 지방’ 프레임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부산, 울산 같은 남부지방이 최근에 서울보다 미세먼지가 나쁜 날이 많았다는 걸 알고 있느냐며 되물었지만, 나는 실제 팩트(fact)를 가져와도 그 유서 깊은 프레임을 깰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방은 흔히 시골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조금은 낙후된, 그래서 평화로운, 그야말로 낙원의 이미지다.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며, 지방은 그 주변부, 즉 자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각주:1]  미디어가 이러한 프레임을 예쁘게 빚는 데 일조한다. 올봄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 생활에 찌든 젊은 주인공들이 시골로 내려온 후 느끼는 안식을 잔잔히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청춘들아, 쉬어가도 괜찮다’며 다독이고 싶었다 [각주:2] 는 감독은 주변에 흔히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평화로운 모습을 나열하며 지방을 ‘쉬어가기 좋은 곳’으로 그려낸다. [각주:3]  그런데, 지방을 낙원으로 그려내는 바로 그 시도는 동시에 지방을 ‘일상을 영위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은 분명 누군가에게 일상 공간 그 자체이다. 그때 다시 한번 사람들은 우리의 삶의 구역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서, 아는 척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과 겹쳐져 괜스레 울적해졌다.

 

내가 사는 장소, ‘지방’ 뿐 아니라 서울 사람들은 나,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에게도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이질적인 말투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지방에서 왔다는 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단연 사투리였다. 말투는 숨길 수가 없으니까. 친구나 선배들이 종종 사투리를 언제 고칠 거냐며 물을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사투리가 고쳐야 할 병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서울을 ‘주류’로, 표준어를 ‘정상’으로 취급하는 그들의 사고방식 아래에서 지방은 ‘비주류’로, 따라서 사투리는 금방 ‘비정상’이 되었다. ‘넌 서울말 잘하는데?’를 대단한 칭찬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시혜적인 태도도 내심 불편했다. 나의 멋쩍은 표정을 보고 그들은 꼭 한마디씩 덧붙였다. “사투리 고치지마~ 난 사투리가 더 좋은데! 귀엽잖아.” 사투리 한 번만 써달라며 부추기는 사람들을 보며, 서구가 동양을 소비하는 방식인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렸다. 순종적인 동양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진 서구의 ‘yellow fever’ [각주:4] 는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못지않은 ‘사투리 쓰는 여자’에 대한 로망을 보았으니 말이다. 두 현상은 모두 상대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상대에 관심이 없고, 오직 본인이 만든 상(像) 내에서 상대를 바라본다. 지방은 그저 언제나 서울사람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경상도 여자가 실제로 ‘오빠야’라는 표현을 즐겨 쓰건 말건, 자기들에게 한 번만 오빠야라고 불러주길 원했다. 나는 곧 그들의 환상에 환멸이 났다. 나조차도 어서 사투리를 ‘고쳐야’겠다고 결심할 지경이었다.

 

 

 

지방에서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리틀 포레스트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다

 

 

폭력으로서의 서울 중심주의는 나의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과 상황만을 비판해서 될 문제는 아니다. 나의 경험들은 애초에 사회가 서울 중심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발생한 부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심각한 요인으로 서울의 인프라 집중 현상을 꼽을 수 있다. 문화·교육·의료 등 사회기반시설이 서울에 밀집되어있지만, 특히 공연/예술 계열은 서울과 비서울의 격차가 심하다. 부와 인구가 집중된 곳에 문화가 자연히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서울의 문화시설 편중도는 지나친 수준이다. 국립 문화 시설, 국립 박물관, 국립 미술관, 국립 극장(공연장) 등이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립 미술관은 각 지역에 분관을 둘 수 있도록 했지만, 서울에만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같이 3개나 자리하는 것에 반해, 비(非)서울 지역에는 2019년에 개관 예정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유일하다. 수치로 따지면 더욱 적나라하다. 2014년 지역별 예술 활동지수 [각주:5] 에 따르면, 서울 100을 기준으로 경기 24.9, 부산 17.7, 그리고 나머지 지역들은 10을 웃돌거나 채 넘지 못한다. 서울에 전국 인구의 20%가 사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병리적인 쏠림이다. 권리를 누리고 싶으면 서울에 가는 것이 당연한 대한민국에 ‘서울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은 아닐까.

 

 

 

서울에 인구와 인프라가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건 하나의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 중심주의를 당연하게 가정하는 이데올로기는 결코 사실의 문제가 아닌, ‘가치’의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소통창구로서의 미디어가 서울 중심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가치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 문제가 된다. 미디어의 대상은 전 국민임에도, 미디어는 온통 서울을 ‘기본’으로 전제한다. 가령, 한 방송국이 ‘시청 앞 광장’에서 여성 인권집회가 일어났다고 보도했다가 지방시민들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대체 무슨 시청을 말한단 말인가. 시청을 서울시청으로 자연히 알아듣는 것은 오직 서울사람들뿐일 것이다. 이것을 보도한 방송국은 엄연히 중앙보도국이었다. 슬프게도 이는 꽤 익숙한 일이다.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당시, 서울 2호선이 고장 난 일이 있었다. 언론사들은 기사 제목에 서울을 붙이지 않고 그냥 2호선이라고만 표기해 지방 시민들은 부산 2호선, 대구 2호선으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서울 2호선 외에도 얼마나 많은 2호선이 전국에 존재하는지 알고나 있을까. 심지어 네이버 핫토픽 키워드에서도 ‘서울 지하철 2호선 고장’이 아니라 ‘지하철 2호선 고장’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라고 믿어지는 사회라 가능한 일이다.

 

서울을 기본값으로 전제한 미디어에서는 서울시민이 아닌 우리의 일을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작년 가을, 포항에서 지진이 났을 때 ‘별일 아닌데 유난 떤다’, ‘수능연기라니 말도 안 된다’라고 떠드는 몇몇 포털사이트 댓글에 분노했다. 지진으로 역시 고통을 겪었던 내 수험생활이 떠올라서였다. 문득 ‘서울에 지진이 났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일제히 속보를 보도하지 않았을까. 다시 말하지만, 경주 지진 당시 긴급 편성은 단 하나도 없었다. 뉴스로 확인하려고 TV를 켰던 내가 멍청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서울에 모든 것이 집중되다 보니 비수도권 지역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나도 서울에 별다른 피해가 없다면 속보는커녕 부실한 보도가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16년 경주 지진 논란이 그랬다. 지상파 및 종합 일간지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아울러야 한다는 보도원칙에 합의했지만, 보도내용만 보면 지역 불균형적인 프레임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각주:6] 영향력이 큰 중앙언론이 서울 중심주의적인 보도를 하니 국민은 의당 서울이 나라의 중심이고 심지어는 나라 자체라고 세뇌당한다.[각주:7]  이쯤 되면 서울 중심주의를 넘어,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라고 불러도 될 지경에 온 것은 아닐까. 

 

 

​서울공화국을 만든 '인'서울중심주의

 

 

어쩌다 대한민국은 이토록 서울 중심적으로 굴러가게 된 걸까. 단순히 이 현상을 ‘서울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로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서울에는 실로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이름난 유럽 도시의 인구는 대개 100만 명 미만인 데 반해, 서울은 1000만 명인 데다가 인근 경기도까지 합하면 2300만 명으로서 전국 48%가 수도권에 살고 있다. ‘파리와 그 밖의 사막’이라는 자조적 표현을 가진 프랑스에서도 파리권 인구는 19%에 불과하니, 한국의 수도권 집중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인구의 집중은 서울 중심주의가 낳은 또 하나의 결과이지, 그 자체로 서울 중심주의의 원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서울이 대한민국이 된 근본적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서울에 왜 인구가 집중되었는가’의 이유를 다시 파악해야 한다. 그 원인을 1960-70년대 경제개발방식이나,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일자리가 있는 서울로의 인구 쏠림 현상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이렇듯,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이 현재의 서울을 초래했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서울이 대학생을 독점하는 입시 시스템에 특히 주목하고 싶다. 다시 말해,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 된 것은 ‘인서울 [각주:8]  대학이 곧 대한민국 대학 그 자체’인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지방에서 자랐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나와 내 친구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서울 중심주의의 시작은 너무나 명확하다. 어쩌면 지방을 위한 인재가 될 뻔했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인재를 독점하는 서울 중심적 입시제도로 인해 서울 중심주의에 합세하는 세력이 된다. 입시를 거친 대학생이라면, ‘명문대란 명문대는 모조리 서울에 몰려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로 암송되는 입시서열에 비(非) 인서울 대학의 자리는 없다. 공부를 잘한다고 여겨지는 지방 수험생들은 스무 살이 될 무렵 손쉽게 그곳을 떠나 서울에 살기로 선택한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강요된 선택에 가깝다.

 

서울과 지방의 대립 구도 속에서 지방은 중심과 주변, 선진과 낙후, 세련됨과 촌스러움 등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주로 후자와 결부되어 왔다. [각주:9]  그리고 지방대 역시 후자의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방’과 ‘잡스럽다’라는 단어가 합쳐진 ‘지잡대’라는 비하 발언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지방대생을 ‘변방의, 잡스러운 존재’로 구분 짓는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대학을 긍정하기 어렵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 사회 내에서도 지방대는 철저히 소외된다. 교수사회 내에서 지방대 교수의 논의는 ‘촌스럽고, 비생산적인’ 논의로 치부되기 일쑤다.[각주:10] 국립대학이 전국 각지에 존재하긴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비슷한 수준이라면 지역 소재 대학보다는 서울권 대학교를 진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지방거점 국립대의 위상은 높았다. 그러니까, ‘인서울 OO대에 가기보다는 가까운 지방거점 국립대를 가겠다’는 말이 부모님에게서,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수용되는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실제로 내 수험생 시절을 돌아보면, 서울 중위권 대학보다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학에 가겠다고 했다가 담임과의 특별면담이 잡히는 일이 허다했다. 지방분권 시대라는데, 지방의 부정적 의미는 쇄신되기는커녕 지방대의 몰락과 함께 오히려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탈출구는 서울이다. 서울 중심적으로 나열된 대학 서열은 고등학생들의 고개를 서울로 돌리게 만든다. 이러한 문화 때문에 스무 살부터는 새로운 이분법이 적용된다. 서울에 살고, 지방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입성하고, 서울에 ‘못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방대 학생들은 지방에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남게’ 된다. 서울중심주의를 주도하는 지방의 부정적 인식은 여기서 시작한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는, 잉여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멀어지길 꺼린다. 지방대학 입학은 물론, 지방 기업 취업도 마찬가지다. 인구는 계속 줄어든다. 그런 곳에 기반시설이 발달할 리가 없다. 또다시 인구가 줄어든다. 지방대의 몰락은 지역경제를 비롯한 지방의 몰락을 가중시키고, 지방의 몰락은 지방대가 재기할 기회를 원천 봉쇄해버린다. 이러한 악순환의 시작은 단연 젊은 세대들을 삼켜버리는 한국의 대학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악순환을 끊을 열쇠 역시 한국의 대학제도에 있지 않을까. 정부는 서울 중심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기관의 직접적인 분산정책의 시행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바라는 기대효과, 즉 서울의 인프라 분산을 통한 지방의 성장은 대학입시제도를 빼놓고는 실현될 수 없을 테다. 서울 중심주의라는 악순환이 지역경제, 인구, 취업, 대학입시 등 복합적인 요인과 맞물려 있듯이 악순환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시도도 지방 자생정책, 지역 할당제, 공공기관 분산, 그리고 입시제도 개혁과 같은 여러 정책과 모두 맞닿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 계속 예민한 사람이기를

 

 

끊임없이 서울 중심주의에 열심히 분노해왔다. 그리고 어느덧 서울내기 2년 차, 나는 분노하고 반항하는 것 보다 그저 눈을 감고 순응하는 것이 속 편한 선택지임을 깨달았다. 서울사람이 되기로 타협한 것이다. 지하철 게임에 주눅 들던 내가 가끔은 지하철 게임을 주도하기도 하고, 주소지를 변경해 이번 지방 선거에서는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온전한 ‘서울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고향 친구들은 너 ‘서울사람 다 됐네’라며 나를 구분 짓고, 주민등록증은 내가 서울시 서대문구에 산다고 말해주지만, 여전히 나는 서울 사람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서울에 소속감을 느끼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적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요 근래 출신지를 말했을 때 ‘오, 사투리 정말 안 쓰시네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 꽤나 심란했다. 서울 중심주의에 분노하던 내가 오히려 서울 중심주의에 힘을 보탠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마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나는 나와 서울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껴왔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신입생 환영 행사의 술자리에서 지하철게임이 시작되자 고개를 떨구는 한 새내기를 보았다. 그때 작년의 내가 떠올라 내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왜 이런 게임을 하냐면서 장난식으로 게임을 중단시켰지만, 그마저도 그 친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문득 저 친구에게 앞으로 지하철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생각했다. 그때 다시 묵혀두었던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분노가 꿈틀했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서울 중심주의에 분노하는 당신들 모두, 서울의 모든 인프라를 포기하고 지방에 가서 지방을 살려라, 구조를 개혁시키자’ 같은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변하지 않았는데 개인의 행동 변화만을 촉구하는 것은 분명 폭력적일 테다. 더군다나 나 역시 지방을 살리려 애쓰기보다는,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살아갈 계획이다. 대부분의 지방출신 인서울 대학생들의 생각도 그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생산적인 대책이 빛나는 결론을 내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서울사람이 되기 전에, 서울 중심주의에 무뎌지기 전에, 이 질서에 흠뻑 젖어버리기 전에 말하고 싶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말이다.

 

 

고발하고 싶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다. 내가 설사 서울사람이 되어버린다 해도, 절대 순순히 되어주고 싶지는 않다. 서울에 살면서도, 그저 끊임없이 서울 중심주의에 예민한 사람이고 싶다. “서울, 그놈의 서울이 뭐라고!” 거리면서 말이다.

 

 

 지민 (iamjimin0909@gmail.com)

  1. 서울중심주의의 언어폭력”, <한겨레>, 2005.11.23. [본문으로]
  2. 리틀포레스트 임순례 감독당신께 위로가 되었길’ ”, <국민일보>, 2018.03.02. [본문으로]
  3. 귀농, 귀촌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 <경기일보>, 2018.03.21. [본문으로]
  4. 아시아 여성들이 순종적이고 얌전할 것이라는 편견과 환상을 가지고 아시아 여성과 교제하고 싶어하는 인종차별적인 사람, 또는 사상을 뜻한다. [본문으로]
  5. 문학, 시각, 국악, 양악, 연극, 무용의 6개 예술 분야에서, 서울을 100점으로 두고 다른 지역의 활동 점수를 매기는 지수이다. 주로 지역별 예술 인프라 격차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된다. [본문으로]
  6. 수도권 중심의 재난보도, 이대로 좋은가”, <기자협회보>, 2016.09.21. [본문으로]
  7. 언론의 서울 중심주의를 타파하자”, <경북대신문>, 2001.11.16. [본문으로]
  8. 인서울 대학교, 약칭 인서울은 Universities in Seoul라는 영어 표현에서 유래하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에 소재하는 4년제 대학교를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9. 홍석준, 「지방대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주의」, 『당대비평』, 생각의 나무, 2004, p. 132. [본문으로]
  10. 홍석준, 「지방대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주의」, 『당대비평』, 생각의 나무, 2004, p. 13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