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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7호> 베트남 전쟁_ 끝나지 않는 고통, 마침표 찍은 기억_편집위원 얀

by yonseiji 2025. 12. 20.

 

 

 

[Intro] 먼지 쌓인 역사

 

 

2018년 여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관부재판을 다룬 <허스토리>가 개봉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2018년 4월 21일과 22일에 진행된 시민평화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스토리>에서 일본에 가 피해를 증언하는 주인공들의 아픔과 올해 시민평화 법정에서 한국군에 의한 피해를 증언하는 응우옌티탄 씨의 아픔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면서 2018년 현재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이를 기억해야 할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민간인, 여성에 대해 한국군이 자행한 학살과 성폭행이 있은 지 50년이 지난 시점이란 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베트남 전쟁은 기억되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전쟁특수를 떠올릴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 교과서에서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서술했는지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베트남 전쟁에 관한 내용은 한 줄의 서술이 전부인데, “그리하여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였다.”고만 써 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교과서는 어떨까?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다음 두 문장의 내용만이 기재되어 있다. “미국의 참전 요청을 받은 박정희 정부는 1965년에서 1970년 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우리나라 안보와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장비를 제공하고, 베트남 주둔 한국군에게 필요한 보급 물자와 장비를 한국에서 구입하여, 한국에 대한 기술 원조 강화와 차관 제공 등을 약속하였다.”고 말이다. 이처럼 역사 교과서는 파병했다는 사실 자체만 단편적으로 전달하거나, 전쟁 특수를 언급하며 마치 파병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의 고통에 대한 서술은 찾아볼 수 없으며, 평화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동안 사과 표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한겨레> 연속 기사로 베트남 문제가 알려지면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한베평화재단이 꾸려지기도 하였고, 김대중(2001년), 노무현(2004년) 전 대통령 때 부분적 사과 표명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고, 한국 언론을 통해 한국인만 알고 있었다. 또한 지난해 문 대통령은 현충일 축사에서 ‘베트남전 참전 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 경제가 살아났다’ 고 말했던 것이 베트남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인 학자가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한 것과 다름없다. [각주:1]  이처럼 우리나라 정부도, 국민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뿐 아니라 베트남 정부 또한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 승전국이기에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기에 전쟁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양국 모두에 의해 소외되고 있다. 

 

 

국가가 덮어버린 상처

 

 

한국 정부는 교육과정에서 베트남 전쟁을 미국과의 관계에서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묘사하며 월남파병 덕분에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는 방향으로만 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정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파병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이 먼저 우리에게 파병요청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우리 정부가 먼저 월남파병을 제안했다. 처음 제안했던 것은 한국전쟁이 휴전을 한 지 채 1년도 안 된 1954년 1월 베트남의 ‘항불전쟁’에 프랑스군을 위한 파병을 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 제안을 미국이 거절했지만,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박-케네디 회담 중 또 다시 월남파병을 먼저 제안했다. 그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이를 또 거절하였지만 결국엔 3년 뒤에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각주:2]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고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 차례 파병제안을 했다. 그러나 파병 이후에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전쟁경비와 수출흑자에 눈이 멀었다. 1967년 미국의 관리인 윌리엄 포터는 “미국이 전쟁경비를 줘서 한국 정부가 돈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5만 명의 파병 한국군을 ‘알라딘 램프’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즉, ‘경제성장’에 주목하여 긍정적인 경험으로 말하는 것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 경험을 미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식의 기억은 전쟁의 잔혹함을 철저히 지우고 만다.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국외에서도 있었다. 2000년 12월 ‘월남 참전 전우 복지회’에서 하미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하며 위령비를 세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위령비 건립에 기부했다는 명목으로 학살 과정의 내용은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군 참전군 단체인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한국의 ㈜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압력을 가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했고 결국 베트남 중앙정부가 비문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미마을 학살 유족들은 진실을 왜곡할 수 없기에 대신 비문을 덮었다. 대리석을 덧대기 전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한국군의 학살에 대한 묘사와 함께 용서와 화해의 내용도 새겨져 있었다.

 

“그 옛날의 전장은 이제 고통이 수그러들고 과거 우리에게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슬픔을 안긴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사과를 하였다. 그리하여 용서를 바탕으로 비석을 세우니 인의로써 고향의 발전과 협력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하미마을 사람들은 잔혹한 역사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위의 비석에서처럼 한국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문의 내용뿐 아니라 하미마을 사람들은 실제로 하미마을에 방문한 한국인들에게도 가해의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지 말라며 걱정과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희생자, 유가족, 주민들에게 또 다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다.

 

연꽃무늬 대리석이 덧대어진 하미마을 한국군 증오비

                                                         

지난 4월에는 잊혀져 왔던 한국군에 의한 학살을 드러내기 위해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 두 명이 직접 한국으로 오기도 했다. 한 원고는 한국군에 의해 가족 5명이 사망했고, 본인 또한 다리, 허리에 상해를 입었으며 왼쪽 귀로는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진술했다. 피해자가 학살의 살아있는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유감표명만 했을 뿐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죽음을 덮어버린 ‘망각의 연꽃’ 또한 떼어 내지도 않았다.

 

또한 국가에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메모리얼 [각주:3] 에서도 전쟁의 상처는 가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전쟁기념관’과 국립 서울 현충원의 ‘월남참전기념탑’가 그 예이다. 이 두가지 메모리얼에서는 전쟁을 신화화 하고 있다. 전쟁기념관 기획 당시 월남파병관의 전시 목표는 자유 반공의지를 천명한 파병의 업적을 과시하며, 한국군의 용맹성을 부각하는 데에 있었고, 전시 방향은 참전배경을 이해시키고, 한국군의 국위 선양활동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었다. 특히 월남파병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 주요한 방향이자 목표였다.(전쟁기념사업회, 1997: 302) [각주:4] 즉, 베트남 전쟁을 ‘반공자유수호’라는 국가적 대의를 위한 숭고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 참전군인은 숭고한 희생으로만 기억되었다. 전쟁의 불가피성과 정당성, 혹은 전쟁을 통한 국익 확보만을 세뇌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전쟁이 신화로만 기억될 때, 비극은 말끔히 표백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이후 발생할 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해 어떠한 경각심도 주지 못한다. 월남전 참전기념탑 역시 전쟁을 정당화하는 듯하다.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기념탑 앞에 있는 참전군인의 동상은 전쟁과 폭력 앞에 취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두려움 없는 전사의 모습만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연출의 이면에는 전장에서 겪는 두려움과 고통, 아픔과 상실과 같은 실제는 지우고 남성성과 전쟁을 연결시켜 전쟁의 명분을 세우는 효과가 있다.

월남전 참전기념탑

 

 

[각주:5]">
베트남참전기념관 구찌터널 재현 [각주:6]

                                                                                       

 

한편 베트남참전기념관에서는 전쟁의 정당화를 넘어서 현지 재현을 통해 폭력까지 행사하고 있다. 베트남 현지 재현물 중 꾸찌터널을 재현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꾸찌터널 입구 광장에는 한국군이 ‘베트콩’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베트남인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의 인형이 있다. 이러한 재현물의 폭력성은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의 기념관에서 한국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재현물을 보게 되면 어떨까? 베트남참전기념관의 전시 주제는 ‘이해와 화합’이다. 주요한 전시 취지는 ‘베트남과 교류 기틀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모습과 전쟁에서 특히나 더 취약했던 이들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상황에서 누구를 이해하고 누구와 화합한다는 것일까. 이 공간에서 ‘이해와 화합’은 한국과 베트남 간 관계의 화합이 아닌, 그저 국가와 국민 간의 전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기 위한 수사로만 등장할 뿐이다. [각주:7]

 

그렇다면 베트남 정부는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베트남전쟁이 종결된 지 17년 후인 1992년에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한국과 베트남이 공식 수교했다. 당시 공동성명에 서명한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양국 간에 일시적으로 불행한 시기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두 나라 국민에 주어진 과제’라며 한국의 베트남 참전 문제를 언급했다. [각주:8]  그러나 수교 당시 배상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베트남은 “우리가 승전국이기 때문에 한국 쪽으로부터 사과 등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해 과거를 덮는 것은 과거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길이 아니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곳곳에 학살당한 넋을 기리는 80개 이상의 위령비/증오비가 세워져 있고 베트남 민간인들은 한국에게 공식적이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왜 국민들의 상처를 덮으려고 했을까. 대외적인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승전국으로서의 자부심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베트남 전쟁은 승리한 전쟁이므로, 다른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는 것은 승리의 의미를 갉아 먹게 된다. 하지만 국가적 이익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베트남 정부에게는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 베트남과 한국 간 교역량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18년 기준 베트남에게 한국은 1위 투자국이자 2위 무역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 정부의 과거사 관련 공식입장인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Khep lai qua khu mo huong tuong lai)는 국가적인 이익에 밀려 민간인 피해자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베트남 정부는 언론이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기사를 연이어 취급하자, 비공식적으로 보도 자제 방침을 각 언론사에 내려 보냈다. 실제로도 이를 취재하려는 로이터의 현장취재 활동을 불허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국은 모두 개개인의 피해자를 외면했다. 한국은 가해 당사국으로서 ‘폭력을 망각’ 했다면, 베트남은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에 눈을 감는 ‘망각의 폭력’을 수행한 것이다.

 

​여성의 희생을 밟고 서 있는 전쟁

 

베트남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국가가 배제한 대표적 존재는 여성이다.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약 5천~3만명에 달하고 증오비에도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새겨져 있다. 국내 시민단체인 ‘나와 우리’가 베트남을 찾아가 생존자 증언을 들은 바에 따르면, 미국과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강간 후 살해’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강간 후 나무에 매달아 칼로 배와 음부를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고, 임신 8개월 된 여성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불에 태운 사례, 성폭행 후 가슴을 도려낸 사례, 집단 강간한 사례, 여성들을 발가벗겨 묶은 뒤에 우물에 빠트려 죽인 사례 등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은 잔혹했다. “강간 후 살해”가 잦았던 이유는 분명 베트남 여성이 ‘성애화된 존재’로 대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통신기사를 보면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어떻게 간주하는지 알 수 있다.

 

“염려 마십시오. 입으로 꼭 깨물어 뜯어도 비린내도 나지 않는 싱싱한 처녀를 끌고 오겠습니다.” … “아주 이쁘게 생겼는데요, 아까운걸요. 유방도 아주 싱싱합니다.” “알았어. 육체에는 손을 대지마.” … “고년이 반항만 안 했더라도…” 돌아오며 베트콩 처녀를 죽인 것이 못내 아까웠던지 강병장이 혼자서 중얼거린다 (자료:박조연, “생포된 처녀 베트콩.”)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여성을 마치 사냥감처럼 간주했다. 여성은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존재했다. 한편, 베트남 참전군인의 이야기에도 베트남 여성에 대한 한국군의 성폭행과 학살의 증언이 담겨 있다. 

 

(참전군인)“분대끼리 무전기를 때립니다. 여자 한 명이면 식사 추진식사 추진, 1인분’이라고 하죠. 하하하!”

(기자A) “남자 한 명이면 뭐라 그러죠?”

(참전군인) “남잔 보고 후 바로 쏩니다. 작전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까요. 베트콩인거죠. 하지만 여자는 안 쏘고 기다립니다. 매복지점 바로 앞까지. 그리곤…”

덮지죠강간합니다집단으로 윤간합니다. 그럼 다른 매복조에서 무전을 막 때립니다. ‘너네만 먹냐이쪽으로 배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으러 간다고요…(중략)”

식사가 끝나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그냥 쏴 죽입니다. 증거를 없애야 하니까. 중대엔 베트콩을 사살했다 보고하죠. 

맨날 있던 일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 현장에 가서 기도를 하고 싶었어요. 용서해 달라고…(중략)” [각주:9]

 

베트콩 여성을 생포하면 집단 강간하고 ‘먹는다’며 희화화하는 것은 성폭력을 가벼운 것으로 여기며 여성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는 의식의 반증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여성’이 당한 강간은 한국군을 위한 성적, 감정 노동으로, 즉 ‘위안’으로서 기능했다. 또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적의 재산’인 ‘베트콩 여성’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베트남 여성에 대한 성폭행과 학살은 베트남 여성에 대한 판타지 형성을 통해 가려졌다. 한국군을 환영하는 베트남 여성, 참전군인에게 꽃다발을 전하고 리본을 달기 위해 동원되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고생 등 베트남 여성은 한국군의 ‘치어리더’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모습의 이면에는 베트콩은 악이고, 베트남 여성은 악에 의해 희생되는 존재이며 한국군은 약자인 여성을 지켜주는 ‘구원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 또한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간 결혼을 소개하여 로맨스로 전쟁의 고통을 덮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낭만적인 로맨스란 찾아볼 수 없었다. 결혼은 커녕 한국군은 베트남 여성이 그의 자식을 낳으면 침묵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침묵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월남 파병 기간 동안 태어난 ‘라이따이한’ [각주:10] 은 약 5,000명에서 많게는 30,000명이었다. 라이따이한인 응우옌티탄 낌씨는 그녀의 어머니가 미군 부대에서 청소를 하다 한국군이 건넨 주스를 마시고 기절했으며, 기절한 동안 당한 윤간 때문에 자신을 임신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어머니는 평생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며, 낌씨는 한국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매국노의 딸이라고 불렸다. 베트남 여성에 대한 낭만과 로맨스 서사는 폭력적인 실재를 가리려는 것일 뿐이다.

 

한국에서 여성은 주로 ‘위안’의 역할로 동원되었다. 남성은 국방의 주체이고 여성들은 약자의 위치에서 남성을 뒷바라지 하거나 간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는 베트남이라는 전장 속에서 공포를 위안하기 위한 존재였다. 전장에서 병사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어머니의 ‘희생’에 감사하며 사기를 다졌다. 또한 모성은 전쟁의 명분으로 사용되었다. 베트남 파병 당시 자발적 지원자는 적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제작진에 따르면 광주/전남 지역 참전 사병들을 조사한 결과 74.7%가 자발적 지원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병사를 모으기 위해 모성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것이다. 1965년 11월 동아일보에 실린 ‘월남간 아들’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대한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 맹호-청룡-비둘기들이 장글에서 움직이는 이야기, 파월장병에 대한 정성어린 위문행사, 놀랍고도 흐뭇한 온갖 소식들이…시동생이 그 때 무사히 돌아왔던 것처럼, 내 아들 철이도 자유와 평화의 월남을 건설하고 대한의 여러 용사와 함께 강한 몸과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내 앞에 올 때까지…(중략)” 이 기사를 보면, 국가와 어머니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국가는 병사를 직접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모성 이데올로기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성애 내러티브는 참전군인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위로와 평안을 주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모성애 내러티브가 ‘위로’의 기능을 했다면,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위문’이 되었다. 전쟁 당시 참전군인은 남성의 편지 보다는 여성의 편지, 위문품보다도 여성의 편지를 원했다. 여성의 편지는 낭만적이며, 전장의 사기를 충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진 것이다. 이러한 위문은 군대를 ‘남성’들만의 특수한 공간으로 만들었고, 여성은 ‘치어리더’의 위치로 고정시켰다. 미디어도 여성을 향해 끊임없이 위문편지를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은 주변부적 위치에만 머무르게 되었다. 한편 위문공연에서 여성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다음의 사진과 그 설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 '늘씬한 한국미녀들 월남서 활약중' (선데이 서울 1969년 3월 30일)

                                                 

“…수출이란 또 하나의 임무를 이 아가씨들은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중략)…노래하는 아가씨들 관객들은 노래보다도 그 늘씬한 미니스커트에 매료된다. 때로는 스테이지 끝까지 나아가서 손짓과 미소와 풍만한 육체의 과시로 관객을 뇌살하려는 전술도. 이리하여 사이공의 밤은 또 하루가 깊는다.”

위에서 묘사된 것처럼 위문공연에서 여성은 성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보는’ 행위에 있어서 ‘존 버거(John Peter Berger)’는 “남성들은 행동하고 여성들은 나타난다. 남성들은 여성을 본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보이기 위한 존재로 자신들을 주시한다.” [각주:11] 라고 말했다. 여기서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람’ 사이의 성별 관계가 나타난다. 즉, 시선 권력의 위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위문공연에서 이처럼 여성, 아니 여성의 몸은 남성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인 <님은 먼 곳에>에서도 위문공연과 시선의 권력을 재현하고 있다. 위문공연을 다니는 주인공인 ‘순이’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노래를 부르며 속옷을 던지기도 했다. 열광하는 군인들 속에서 ‘순이’는 사기를 충전시켜 주었다는 것에 만족을 느낀다. 여기서도 여성은 성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에서 왜 굳이 ‘여성’의 고통에 주목해야 하는 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에서 여성의 체험을 기억해야할 명확한 이유가 있다. 국가적인 관점에서 혹은 이데올로기간 갈등만으로 조명하는 전쟁의 기억은 성별 차이, 혹은 계급 차이에 의해 사람들이 같은 전쟁을 어떻게 다르게 겪었는 지, 그 차이의 맥락이 무엇인지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여성과 민간인, 그리고 참전군인들이 겪은 고통은 모두 다르다. 전시에 벌어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강간은 과연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우발적인 행위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그 곳에서도 여성혐오의 구조가 만연해 있었고 단지 전쟁이라는 극한의 시기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참전군인,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양가성

 

한편,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군인은 이중으로 소외되었다.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인 동시에 손에 피를 묻힌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참전군인들은 국가의 안정적인 경제발전에 기여한 이들로 여겨지지만, 사실 전쟁 중에도, 그 이후에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파병 당시 미국으로부터 전쟁경비를 지원받았음에도 파병군인의 월급은 미군의 월급의 1/3 정도로, 당시 남베트남 군인의 월급과 유사하거나 그 이하였다. 또한 전쟁이후에도 18년간 국가로부터 어떠한 피해 배상 받지 못했는데, 1992년이 되어서야 고엽제 피해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파병군인들이 가해자로 호명되는 것에 반발하는 이유 역시 국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지도 못한 상황에서 가해자로서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1992년 9월에 처음으로 고엽제 피해자 대책 마련 촉구를 위한 참전군인들의 경부고속도로 검거시위가 시작되었고 6년간 투쟁 끝에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감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유감 표명 이후 어떠한 배상 약속도 없는 상황에서 1년만에 베트남 진실위원회와 <한겨레21>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을 흔들었다. 이처럼 ‘국가주의’와 ‘발전주의’가 참전군인을 ‘파월 용사’의 이미지로 만들긴 했지만 피해 배상은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국민들로부터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을 허물고자 하는 시도를 마주한 참전군인은 가해자로 정체화되는 것에 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피해자로 정체화한들 가해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참전군인들은 부채감에 항상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인정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옳지 못한 일을 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에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전군인들에게 있어서 베트남 전쟁은 자랑스러운 경험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전장의 두려움, 전우의 죽음을 목격하며 느낀 슬픔, 인간성이 파괴되는 학살의 현장이 그들이 기억하는 실제 전쟁의 모습이지 않을까? 기억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국가가 만들고 주입한 전쟁의 의미를 거부하고 스스로 의미를 규정한다는 뜻이다. 참전군인들도 자신의 기억을 말할 때는 더 이상 국가의 발전을 위한 용사가 아니다. 그저 죽음이 두려웠던 평범한 청년이며, 생계를 걱정했던 가난한 인간이며, 전쟁 후에도 끝나지 않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전쟁의 피해자이다.

 

지난 4월 21일 진행되었던 베트남전쟁 시민평화법정에서 한 참전군인은 자신이 목격한 학살의 현장을 증언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학살 사건 [각주:12] 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힌 기억은 훈장만으로 지울 수 없으며 그 트라우마를 회복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참전군인들은 국가유공자의 지위를 받고 명예회복을 위한 기념비까지 세워진 2018년에도 본인의 손으로 죽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시민평화 법정에서 누군가 “대부분의 참전 군인들은 학살 사실에 대해 모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라도 참전군인들이 피해 생존자들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참전군인들은 손뼉 치며 호응했다. 참전군인들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며 사과하고자 한다.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도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고 평화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야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월남 파병이 50년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단편적인 사실이나 전쟁 특수만으로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도 아무 이유없이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넋들이 기려지지 못한 채 떠 돌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써 내려가는, 그 역사를 지워가는 중심에는 국가가 있었다. 여성은 전쟁과 남성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었고 기억에서 조차 주변화되었다. 참전군인은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이자 전쟁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가해의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영웅으로 불리면서 실제로 느끼는 전쟁의 잔혹함과 고통은 모두 사라졌다. 전쟁에서는 영웅이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되며 인간만이 존재할 뿐인데 말이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기억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국가주의와 개발주의 아래에 가려진 전쟁기억만으로 남으면 안 된다. 이는 전쟁이 밟고 서 있는 수 많은 죽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먼지 쌓인 역사를 털어내고 망각되어 왔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베트남 전쟁이 전쟁세대의 삶에는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전후세대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를 들여다 볼 때, 평화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독일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의 방향을 더듬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의 흐름은 ‘외면’하는 단계에서 도덕적인 이유로 당시 직접적인 가해자만을 비난하며 ‘타자화’하는 단계로, 그리고 ‘성찰’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현재 외면하는 침묵의 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다. 우리와 무관한 사건, 혹은 50년 전에 종결된, 그 시점의 역사만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속에서 우리 모두 피해자였다는 것만을 기억하며 가해의 경험을 애써 포장하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자기정당화는 기만이다. 우리에게는 반성적 기억이 필요하다. 홀로코스트 전후세대들이 가해의 경험에 대한 책임을 함께 하고자 할 때 자기 비판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듯이, 우리도 그러한 방향으로 성찰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전후세대인 우리는 어떻게 그 기억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을까. 지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시도로 주로 기념비나 기념관이 세워진다. 그러나 기억은 기념비와 기념관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념비와 기념관은 단지 기억의 계기를 제공해줄 뿐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을 발견할 때 가능하다. 그럴 때에야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고, 유사한 일이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반성으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독일도 처음에는 ‘국민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메모리얼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인간성 상실을 발견하여 그 공감을 확장해 나가 다시는 그 끔찍한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새겨진 메모리얼을 만들 수 있었다. 성찰적 기억은 지금처럼 참전용사들의 숭고함을 기리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숭고함의 찬양보다는 미래세대에 경고하는 메모리얼로,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긴 오명의 메모리얼을 건립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얀 (gmingi86@gmail.com)

 
  1.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올해가 공식사과 적기”, 한국일보, 2018. 3. 6. [본문으로]
  2. 현 한베평화재단(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이사인 구수정 박사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알아낸 사실이다. [본문으로]
  3. 메모리얼이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기억하기 위한, 혹은 추도를 목적으로 만든 물체, 공간, 시간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4. 「한국의 베트남전쟁 기념과 기억의 정치」, 『사회와 역사』 제 86, 한국사학회, 2010, 171p. [본문으로]
  5. 지금은 해체된 모형으로, 베트콩을 무릎 꿇린 모습에서 한국군의 용맹성만을 강조했던 모형이다. [본문으로]
  6. 지금은 해체된 모형으로, 베트콩을 무릎 꿇린 모습에서 한국군의 용맹성만을 강조했던 모형이다. [본문으로]
  7. 앞의 글, 172p. [본문으로]
  8. 앞의 글, 150p. [본문으로]
  9. 여자는한 끼식사, 남자는 바로 쏴 죽였다”, 프레시안, 2015. 4. 7. [본문으로]
  10.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일컫는 말이다. 라이(Lai)오다.’의 의미를 가진 한자의 베트남어로 경멸조로 혼혈을 부를 때 사용하며, 따이한(DaiHan)은 한자大韓으로 한국인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1. 「대중매체에 표상된 베트남전쟁과 젠더 이데올로기-1964~1973년 선데이서울, 여원을 중심으로」, 『국제문화연구학과』, 2017. 2, 79p. [본문으로]
  12.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1968 2 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학살당하여 70여 명이 죽은 전쟁범죄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