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 걸릴 것 같아"
2014년도에 어떤 유행어가 등장했다. 답답한 상황, 혹은 화나는 상황에서 “암 걸릴 것 같다.”, “발암 ㅇㅇ”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고구마 먹은 것 같다”는 표현과는 다르게 심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왜 답답한 상황에서 ‘암’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부감을 느낀 데에는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적이 있고, 중학생 때는 외할머니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고등학생 때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내겐 말기 암 및 에이즈 환자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암’은 그냥 답답하거나 화나는 상황에서 농담 삼아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발암’, ‘암 걸릴 것 같다’는 표현에 엄마가 암 수술을 받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 중간에 마취에서 깨서 비명을 지르던 엄마의 모습. 그러나 나와 같은 경험이 없는 주변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듯했다.
암은 매년 최소 20만 명에게서 발생하는 병이다. 1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암이 큰 고통을 수반하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망각하고는 한다. 그래서 암은 누구나 아는 중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 환자들이 겪는 물리적/사회적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발암’이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는 현상은 이중적이다. 암이란 병 자체는 익숙하지만, 그 병이 가진 위력이나 고통은 희석된 채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의 탄생은 단순히 암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전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질병 혹은 장애에 대한 혐오 표현이 만연했다. 더 나아가 한국사회는 질병에 대한 혐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여기고는 한다. 질병을 욕으로 쓰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에 대해 지적하면 “그냥 쓴 건데 그게 무슨 잘못이야.” 식으로 반응한다. ‘정신병자’의 경우에는 “내가 틀린 말 했어?” 식으로 적반하장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심지어 암 환자의 가족이어도, 중증 환자 본인이어도 ‘발암’, ‘병신’ 등의 언어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또다시 ‘프로불편러’가 나타났다고 비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언어에서 차별받는 이들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발암’이라는 표현을 들으면서 한 번도 움찔한 적이 없다면, 이는 암이라는 병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무지는 질병에 대한 혐오다. 이런 혐오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해소할 수는 있는 것일까.
질병에 대한 아주 오래된 혐오, 욕설
우리의 언어생활 속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가장 잘 나타나는 표현이 바로 욕설이다. 일상에서 욕은 흔하다.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도, 인터넷 댓글을 볼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욕은 언제나 존재한다. 욕 혹은 비속어라고 해서 반드시 비하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친구와 대화하다가 나오는 욕은 친근감의 표시일 때도 있고, 조폭 영화 속의 욕은 동지애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욕은 놀람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무언가를 풍자할 때 쓰는 욕은 통쾌하다.
그러나 욕은 어원 자체가 이미 비하 및 혐오를 내포한다. 『국어대사전』에서는 욕을 ‘남을 저주하는 말, 남을 미워하는 말,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말’로 규정하며, 『우리말 큰사전』에서는 ‘남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이나, 저주하는 말’로 정의한다. 정리하자면 욕은 ‘남의 인격을 무시하고, 저주하며,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는 저속하며, 미워하는 말’이다. 2 즉, 욕으로 사용되는 표현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 가령,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한 욕설은, 인류 역사에서 여성 혐오가 존재해온 만큼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특히 ‘화냥년’에서 ‘화냥’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이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환향’이 변형되어 생긴 말이다. 아무런 죄 없이 이국으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여인들이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낮춰 부를 수 있었던 사회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 중심 사회에서 동물로부터 유래된 욕이 많은 것도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흔히 쓰이는 ‘개OO’는 동물에 대한 비하를 포함한다. 한편 ‘곰탱이’라는 표현은 미련함을 나타내거나, 약은 사람에게는 ‘여우 같다’고 하는 등 인간의 관점에서 각 동물의 특성을 판단하여 그 특성을 비하하는 욕설도 있다. 이러한 욕설은 더더욱 인간 중심적이다.
질병/장애를 대상으로 하는 욕도 마찬가지다. 흔히 ‘바보’, ‘멍청이’ 같은 욕은 거부감 없이 쉽게 쓰지만, 이조차도 지적 질병/장애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병신’, ‘머저리’, ‘정신병자’ 등의 욕설은 대놓고 질병/장애를 혐오하는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쓰이는 욕설이다. 흔히들 쓰는 ‘지랄’과 ‘염병’ 역시 질병에서 비롯된 욕설이다. 우선 ‘지랄’은 조선 시대에 발간된 『역해유해』(1690)에서 ‘딜알’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간질 환자의 발작 현상을 의미한다. ‘염병’ 역시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장티푸스가 사망률이 높은 전염병이었을 때 생긴 욕설이다. 3
이렇게 욕설의 유래를 따지고 나면 ‘암 걸릴 것 같다’, ‘발암’이라는 욕설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암에 대한 사회적 금기가 깨지면서 등장했을 뿐, 오히려 예전부터 존재해온 질병을 모티브로 한 욕의 연장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암에 대한 비하 표현이 공식적으로 처음 드러난 사건은 1999년 폐암으로 사망한 제정구 의원의 영결식 때 당시 한나라당 원내 총무였던 이부영이 “정제구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억장이 터져 DJ 암으로 죽었다”고 발언했을 때였다. 해당 사건은 동아일보에 실리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암을 대상으로 한 욕설/비속어가 인터넷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발암’, ‘암 걸릴 것 같다’에서 시작하여 무언가가 풀리는 상황에서 ‘항암 XX’, ‘~를 보고 암이 나았습니다’ 등의 표현들이 유래하였다. 또한 암이 전 세계적으로도 잘 발생하는 병이라 그런지, 영어권에서도 ‘That post gave me cancer’라는 표현이 2007년도부터 생겼다고 한다. 욕설과 관련된 이러한 현상은 언어권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질병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과 가장 유사하다. 그러나 욕설을 대하는 태도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욕설은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으며 그만큼 자정 운동도 일어났다. 현재는 장애인 비하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찐따’ 정도만 널리 쓰이고 있다. ‘찐따’는 일본어 ‘침바’, 즉 ‘다리 병신’에서 유래된 말인데 6.25 전쟁 때는 지뢰를 잘못 밟아 다리가 잘린 군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질병에 대한 욕설은 장애인에 대한 욕설과 달리 자정 운동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암을 대상으로 하는 욕은 최근에 등장했고, 주로 사용하는 젊은 층은 질병의 고통과 접할 기회가 적다. 그래서 욕설 안의 질병 혐오를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욕설 안에서 지워지고 합쳐지는 혐오
한국 사회에서 암과 관련된 욕설이 자리 잡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2013년 1월 6일 방영된 드라마 <오로라 공주>에서 설설희(서하준 역)의 대사였던 “암세포도 생명인데”이다. 이 대사는 한국 사회 안에서 가장 유명한 암 관련 비하 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세포들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원인이 있겠죠. 이 세상, 잘난 사람만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듯이 같이 지내보려고요. 나 살자고 내 잘못으로 생긴 암세포들 죽이는 짓 안 할래요.”
당시 배우 서하준 씨가 대본을 받고 나서 5분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인터뷰를 보면, 대사를 말하는 배우에게조차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표현은 당연히 잘못되었다. 세포 단위는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학적 문제는 차지하고 “내 잘못으로 생긴 암세포”라는 표현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암 환자의 잘못만으로 암이 발생했다는 편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암은 유전적 요소, 환경 등으로 인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으며, 단순히 개인이 건강관리를 못 해서 생기는 병이 아니다. 당시 이 대사를 보도한 기사에서 가장 공감을 많이 얻은 두 댓글은 소아암 환자와 그 가족의 댓글이었다. 소아암 환자의 어머니라고 밝힌 사람은 임신 시절부터 종양을 가지고 태어난 자녀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암에 걸렸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로라 공주>의 해당 대사는 유전적,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중증을 앓는 환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을 제거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더 중요한 점은 이 대사를 비롯한 중병에 대한 욕설이나 비하 표현이 중병을 희화화하고 대수롭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장 ‘발암’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다들 처음에 보이는 반응은 ‘뭐 이런 표현이 다 있어?’였다. 그러나 암과 관련된 표현이 점점 보편화되면서, 욕설에 담긴 누군가의 고통과 무게가 흐려진다. 이런 현상은 욕설 문화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흔히 사용되는 ‘극혐’이라는 표현의 심각성이 지워지는 매커니즘이 그러하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극혐’이라는 욕설/비속어는 ‘극히 혐오스러움’의 줄임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어떤 대상에 대해서 ‘혐오한다’는 표현을 쉽게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극히 혐오스러움’을 ‘극혐’으로 줄여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순간, ‘혐오’라는 단어가 가지는 폭력성은 지워진다. ‘극혐’이라는 표현에서 폭력성이 지워지는 방식은 ‘발암’과 유사하다. ‘발암’이라는 표현이 남발되는 순간, 암 환자가 겪는 고통 역시 언어 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편 ‘극혐’이나 ‘발암’만큼 폭력성이 잘 와 닿지 않는 욕설들도 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어원이 오래되어 뜻이 직접 와 닿지 않는 욕설들이 대다수다. 흔히 쓰이는 ‘씹’, ‘씨발’, ‘씹새끼’ 등의 욕은 성적인 욕설로서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씹’은 여성의 성기를 말하고 ‘씨발’의 원형은 ‘씹할’이다. 이는 조선 시대에 여진족을 대상으로 한 욕설로, 수렵을 주로 하는 여진족이 남성들이 집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근친으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 짐작하여 쓰인 욕이라고 한다. 다분히 외국인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한 욕설이다. 그러나 ‘씨발’은 ‘극혐’이나 ‘발암’만큼 어원이 와 닿지 않으며, 그렇기에 당사자인 여성이 ‘씨발’이라 말해도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는 충격이었다가도 습관적으로 욕설을 하면 고통과 혐오가 지워지게 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누군가의 고통을 지우고 소외시키는 욕설은 다른 혐오와 합쳐지기도 한다. 암과 비슷한 맥락으로 욕설의 소재로 쓰이는 병으로는 에이즈가 있다. 1980년대에 최초 국내 감염자가 발생한 에이즈는, 현재는 치료제를 통해 치료 가능한 질환이 되었다. 따라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개발된 국가에서 에이즈는 만성 질환 정도로 인식되고는 한다. 그러나 한때 에이즈는 치료가 힘든 병이었고, 성과 관련된 질병이 특히나 터부시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인식이 좋지 않은 병이다. 한국어에는 “이 에이즈 걸려 죽을 놈아”와 같은 표현이 있으며 영어권에서도 에이즈와 관련된 농담들이 존재한다. 영국의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Ricky Gervais)가 누군가에게 “섹스할 때와 장례식 때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뭘까?(things you can say both during sex and during a funeral)”라고 질문 받았을 때 “에이즈”라고 답한 사건은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에이즈가 단순이 성적으로만 전염된다는 편견을 반영하고, 에이즈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을 희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즈에 대한 욕설은 에이즈에 대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적인 편견,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기도 한다. ‘게이’라는 단어 자체가 욕설로 쓰이는 상황에서 ‘에이즈는 동성애자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병’이라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너 게이야? 에이즈 걸릴 놈아’ 식의 표현이 나타난다. 즉, 질병에 대한 혐오와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합쳐져서 강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이중으로 에이즈 환자와 성 소수자를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셈이다.
따라서 욕설은 욕설에 불과하다는 말은 기만이다. 욕설 문화 안에서 혐오가 지워지고 합쳐지는 현상은 자명하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하고 키워나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죄는 욕설에서 벗어나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질병을 대상으로 하는 욕은 질병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하며 다른 혐오와 합쳐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현상의 기본적인 전제는, 질병을 가진 환자가 사회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간주되는 데에 있다. 또한, 욕설/비속어도 언어문화의 일부인 만큼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유래하며, 이는 다른 욕설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은 없다. 애초에 비장애인은 ‘정상인’,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같은 욕이더라도 ‘년’이 붙는 욕이 ‘놈’이 붙는 욕보다 더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에게는 ‘놈’을 욕으로 잘 쓰지 않지만, 남성에게 ‘년’이 더 치욕적인 욕으로 쓰인다. 한국사회에서 흑인은 유색인종 프레임으로 인해 ‘깜둥이’로 모욕을 당하지만, 한국인 혹은 백인에 대한 욕설은 정확히 없다.
더 나아가, 욕설을 쓰는 우리 자신조차 욕설 속 혐오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성 자신이 ‘~년’이 붙는 욕을 쓰는 경우는 흔하다.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는 타 인종을 비하하던 사람이, 정작 그 사회 밖에서 인종 혐오의 대상이 되면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다. 누구도 사회의 기준에 완벽히 맞는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82년생 김지영 씨도 육아를 끝내고 잠깐 집에서 나와 3천 원 커피를 마실 때 속 편한 ‘맘충’이라 욕먹지 않는가. 따라서 욕설 문화를 바로 잡으려면 단순히 욕설의 유래를 아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욕설도 사회의 일부를 구성하는 문화이므로 약자 혐오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 약자에는 나 자신도 포함하고 타자화될 수 있다는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일상화된 욕설이 지운 폭력을 마주하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욕설은 단순히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다. 그러나 욕설 문화에 대응하는 데에 있어 이를 인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당장 디비피아(DBPIA) 4 에 욕설 문화에 대해 검색을 해보아도, 대부분 논문에서 주 연구 대상은 청소년, 대학생과 같은 청년층이다. 사회적으로 욕설을 처음 익히게 되는 시기가 주로 10대이고, 욕설 문화를 빠르게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유래된 현상이다. 그러나 청소년, 젊은 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교육적 목적이 다분하고 어느 정도 편견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청소년 때니까 교육을 잘 하면 고쳐질 거야.”, “젊은 사람은 말 험하게 쓰면 안 되지.” 등의 편견은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욕설은 ‘예의’의 문제로 취급되기 때문에 젊은 층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것은 명백히 패륜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것은 ‘사랑의 매’로 포장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즉, 욕설 문화에서 젊은 층에만 집중하는 것은 해결 방책도 아닐뿐더러 차별적이다. 따라서 욕설 문화에 대한 해결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혐오 표현이기 때문에 누구나 쓰면 안 된다.”라는 논지로 접근해야 한다.
욕으로 써도 되는 질병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에 이미 익숙해진 질병과 관련된 욕설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평소에 욕설을 쓰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욕설을 한순간에 쓰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는 치료 가능한 병을 대상으로 한 욕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제안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장티푸스는 현재 치료 가능한 병이기 때문에 이를 대상으로 한 ‘염병’은 써도 괜찮다는 식의 논리다. 그럴 듯한 대안이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이 역시 몇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먼저, 그렇게 치면 암, 에이즈를 대상으로 한 욕도 가능해진다. ‘발암’, ‘암 걸릴 것 같다’ 등 암을 소재로 한 욕이 등장한 데는 암이라는 질병이 그만큼 흔해지고 익숙해진 환경에서 비롯되었고, 그만큼 암에 대한 치료법도 많아지면서 암이 완치되는 환자도 많아졌다. 이러한 사회적 양상은 드라마에 반영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드라마 속 백혈병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갑자기 환자가 되면서 두 주인공을 갈라놓는 요소로 등장했다. 그러나 현재의 드라마들은 똑같이 불치병 소재가 등장한다고 해도 주인공이 어떻게 불치병 생활을 겪고 해결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들이 더 좋은 반응을 얻는다. 암이라는 질병이 더 익숙해지고 치료가 가능해진 시대상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환자들의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해당 질병을 ‘현재 시점에서 치료할 수 있는지’는 욕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없다.
더불어, 수많은 질병 중에서도 욕설로서 소비되면서 희화화되는 질병은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감기는 욕설로서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걸릴 수 있고 환자와 비환자의 경계를 나누기도 힘든 질병이기 때문이다. 감기와 같이 가벼운 질병을 욕설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중병이면서도 사회에서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질병이며 누군가를 저주할만한 효과가 있을 때 욕설로 쓰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센병이다. 한센병은 성서에서부터 차별의 기록이 적혀 있을 만큼 차별의 역사가 큰 병이다. 한센인에 대한 강제 낙태 및 정관수술 정책도 199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당시 한센인 2세를 위한 해외입양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B. 고트리브는 정부 관계자에게서 “한국의 한센인이 14,000명이 아닌 8,000명으로 줄여서 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정부 차원에서 한센인들의 존재를 지우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한센병은 현대에 들어서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병이 되었으나, 한센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남아 있다. 즉, 현재는 치료 가능한 병이 되었을지라도 한센병 환자들이 역사적으로 받은 억압이나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쓰이는 ‘나병 환자’, ‘문둥이’ 등 한센병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은 일제강점기부터 차별과 억압을 당한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을 지운다. 천연두에서 유래한 ‘곰보’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천연두는 완전히 사라진 질병이지만, ‘곰보’는 지금도 얼굴의 여드름이 심각한 사람 등을 외모적으로 비하하는 욕설로도 쓰인다는 점에서 혐오의 기제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욕설의 대상으로 쓰이는 질병들은 계속 바뀌어왔다. ‘염병’의 장티푸스에서 ‘나병’의 한센병으로, ‘곰보’의 천연두로, ‘게이’와 엮여 쓰이는 에이즈로, 그리고 마침내 ‘발암’의 암까지 이어져 왔다. 시간이 지나 암이 충분히 치료 가능한 병이 된다면, 또 다른 질병이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서 어느 질병이 욕설로 쓰이는지는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질병 혐오의 본질은 같았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그 질병의 특징이 약점으로 취급당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욕설이 일반화되면 질병의 고통을 지우게 된다.
따라서 그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욕설로 쓰이는 해당 질환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역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현재 치료 가능 여부를 떠나, 과거와 현재에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욕설이 과거든 현재든 고통 받은 환자들의 고통을 지우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치료 가능한 병을 대상으로 하는 욕만 쓰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질병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을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혐오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염병’에서부터 ‘발암’까지, 질병을 대상으로 하는 욕설은 혐오를 지우기도 하면서 다른 혐오와 합쳐지기도 했다. 그 결과, 여성이 스스로 여성 혐오적 욕설을 하거나 장애인이 장애 혐오적 욕설을 하는 현상도 생긴다. 그만큼 익숙하고 만연한 욕설 문화와 그 혐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만큼 욕설 문화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는 여전히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한순간에 ‘멍청이’, ‘씨발’과 같은 욕을 안 쓸 자신은 없다. 그만큼 오래 입에 붙은 습관이다. 그러나 나의 일상에서는 욕설 안에 담긴 혐오를 인지하고 예민함을 유지하고자 한다. 처음 ‘발암’, ‘암 걸릴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을 간직한 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고통을 겪은 사람 혹은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을 ‘프로불편러’라 함부로 이름 붙이는 사회는, 그들의 고통 역시 함부로 지워버리니 말이다. 나의 고통만이 아닌 타인의 고통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기는커녕 지워버리는 언어에 반기를 들고 싶다. 서로의 고통을 기억할 때 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더 다가오기에.
녕 (laurenrhee3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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