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7호> 우리가 외치면 민주주의 그들이 외치면...?_편집위원 얀

by yonseiji 2025. 12. 20.

 

Intro. 기울어진 광장

 

 

2018년 5월 19일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각각 파란 물결과 붉은 물결을 일으켰다. 신촌에서는 아카라카로, 혜화역에서는 편파수사규탄의 열기가 가득 찼다. 아카라카를 즐긴 후 사람들은 신촌으로 내려왔고, 혜화역 시위대는 신촌의 골목들을 돌고 있었다. 혜화역 시위 참가자들이 함께 하자고 손을 건넸지만 이를 바라 보는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왜 사람들은 유독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거부감을 느꼈을까.

 

2년 전인 2016년의 촛불 집회를 생각 해보면 촛불 집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혜화역 시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촛불 집회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서 ‘인증샷’을 남기며 ‘깨시민’으로 자부심을 보이기도 했다. 외부인이나 언론 또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질타하지 않았다. 반면, 여성운동의 현장을 직접 겪으며 제도로 잇기 위해 혜화역으로 간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를 SNS에 공유하자 수많은 질타를 받았다. 혜화역 시위에 참가한 그 자체만으로 시위 당일인 7월 7일 국민 청원 게시판에 여성가족부 장관 경질을 청원하는 요청이 올라왔고 3주 만에 6만 명이 넘는 국민이 동의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수자들이 광장으로 나와 목소리를 낼 때에는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는지,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낙인' 찍힌 그들의 소리

 

 

소수자들의 시위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지난 5월 19일 사법 불평등을 외치며 약 1만 2,000명 가량의 여성이 혜화역으로 모였다. 그러나 경찰은 물론이고 여론에서는 몰카피의자 중 남성의 구속 비율이 더 높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이들의 목소리를 일축했다. A씨는 “여자라서 구속된 게 아니라 피의자가 휴대전화를 은폐함으로서 증거를 인멸하려 한 구체적 증거가 있어 구속했다고 말하며 ‘여자라서 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막무가내식 ‘떼쓰기’ 아니냐” [각주:1] 라고 했다. 또 B씨는 “여자라서 유독 빨리 잡았다는데 몰카 범죄 검거율이 94%가 넘더라. 그 중에 여자는 저 사람 하나”라며 “팩트 제시하는데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 도대체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평등을 외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각주:2]  하지만 경찰청 불법촬영(몰카)’ 범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몰카 피의자 5,437명 중 남성이 5271명이지만, 119명만이 구속됐다. 2016년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다. 이는 2년 동안 남성이 몰카 피의자 중 97~98%가량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피의자 그리고 가해자 중 남성이 절대다수인 것을 고려했을 때 검거된 여성의 수가 적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피의자로 지목된 남성 중 구속된 비율이 현저히 낮은 현실에서 여성이 거리로 나와 사법 불평등을 외치는 것을 막무가내식 떼쓰기로 치부할 수는 없다.

 

소수자의 시위는 폭력적이고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미디어와 SNS상에서 자극적인 것만을 선택적으로 조명하여 폭력적이거나 문란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 또한 프레임에 일조한다. 퀴어문화축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7월 14일에 있었던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청원은 20만 명을 넘어섰는데 청원내용에서는 여론이 만들어낸 낙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청원 참여자들은 “동성애자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변태적이며 외설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며 “매년 퀴어행사장에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복장으로 광장을 활보하고 퀴어라는 이유로 시민의 공간인 광장을 더럽히는 행위를 규탄한다”고 했다. [각주:3]

 

그러나 과연 이들은 정말 ‘노출’만을 이유로 반대하는 것일까? 노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퀴어의 노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이성애자의 노출에는 이토록 극성이진 않으니 말이다. 물론, 혹자는 정말 노출 자체에 반대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반대의 기저를 들여다보면 이성애자와 퀴어의 경우는 극명히 다르다. 이성애자의 노출은 ‘야해서’, 퀴어의 노출은 ‘더럽다’며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정성’을 이유로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한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청원문에서도 시민의 공간인 광장을 ‘더럽히는’ 행위를 규탄한다고 했는데 ‘더러움’과 ‘선정성’은 절대 같은 층위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전자와 같은 감정은 혐오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럽다고 느끼는 그 불편함은 사회가 허용하는 규범 안에서 학습된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비슷한 행위를 퀴어가 하면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기존의 규범을 벗어난 표현에 대한 낯섦과 충격때문이다. 다시 말해,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이들은 사실 과도한 ‘노출’ 때문이 아니라 ‘퀴어’의 노출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는 성 소수자들이 1년에 한번, 거리로 나와 ‘성소수자인 자신을 긍정하는 행사’이다. 퀴어들 중 일상생활 속에서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벽장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가 병리적으로 치부하기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이들도 많다. 따라서 퀴어문화축제는 다수의 이성애자의 눈요깃거리가 되거나 인정을 받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성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축제인 것이다. [각주:4]  그렇기에 퀴어퍼레이드에서의 노출은 성소수자에게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퍼포먼스의 의미를 지닌다. 일상적이지 않은 표현들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은 그 불편함에 대한 대화와 성찰을 통해, 보다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때문에 퀴어문화축제의 노출 퍼포먼스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노출’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현상 그대로를 바라보고 ‘문란’, ‘노출증 환자’로 연결짓는 것을 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각주:5]

 

과격한 시위라는 프레임은 혜화역 시위와 낙태죄 폐지 집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주요 언론사 역시 혜화역 시위의 요구사항이나 구호를 과격하다고 낙인찍었다. 혜화역 시위의 구호 중 여성 경찰과 남성 경찰의 비율을 9:1로 조정하라는 시도가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여성 경찰이 90%가 되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한국의 경찰 중 남성 경찰이 89.2%라는 것에는 놀라지 않는다. 시위의 구호가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9:1을 외쳐봐야 5:5도 가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혜화역 시위는 ‘남혐시위’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남성혐오’라는 말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성립할 수 없다. 혐오란 막연하게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혐오는 권력관계에서 상위에 위치한 다수자가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의도와 효과를 가질 때 존재한다. 젠더권력의 상위에 위치한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랜 기간 차별당했고 폭력에 노출된 여성에 대한 혐오와 남성에 대한 모욕은 그 층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소위 ‘남혐’으로 불리는 표현을 남성이 들었을 때와 여성이 여혐표현을 들었을 때 느끼는 두려움의 층위가 다르다. 내가 ‘남혐’으로 불리는 표현을 들었을 때 느끼는 두려움은 거의 없다. 실재하는 위협으로 전혀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혐오는 실재하며 수많은 폭력적인 범죄로도 발현되는 등 실질적인 배제와 위협으로 나타난다.

 

낙태죄 폐지 집회도 시위 구호들이 자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한 누리꾼은 “합법화될 때까지 섹스 중지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대단한 투사 나셨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누가 보면 섹스를 정부가 시켜서 하는 줄 알겠다”며 “낙태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니들이 별짓 다 해봐라 내가 애 낳냐’등의 구호는 지나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물론 실제로 소수자의 언어가 거칠 때도 있다. 하지만 소수자의 시위는 온건해야 할 필요가 없다. 아니다. 오히려, 과격해야 한다. 지금까지 소수자 운동은 온건한, ‘설득의 언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설득의 언어는 오히려 소수자의 민원 정도로만 취급되기 일쑤였다. 다시말해, 소수자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끊임없이 사소화되고 개인화되었던 것이다.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는 이들도 처음에는 제도권 아래에서 해결을 촉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일시적인 동정과 시혜적인 시선일 뿐이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인 박경석씨는 2001년에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하철로로 내려가 범법자가 된 끝에야 정부는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배리어프리한 고속버스를 위해 명절마다 고속버스티켓을 사서 탑승하려다 경찰들과 마찰이 발생해 집시법을 위반하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광화문역 지하도에서 무려 5년에 걸친 농성 끝에 결국 보건복지부 장관과 만나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는 약속과 부양의무제 기준을 폐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설득의 언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무기력할 뿐이다. ‘예의 바르고 조용한 분노’는 끝났다. 언제까지 증오하지 말고 사이좋게, 평화롭게 가자고 할 것인가? 정말로 증오의 증폭을 우려한다면, 설득의 언어가 유효한 사회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두려움과 코르셋

 

 

소수자의 시위에 참여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왜 우리는 시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까? 먼저 신변의 위협이나 보복이 있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혜화역 시위 주최측에서 당일 참여자들에게 제시한 현장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집회 참여자들에겐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권고되었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나온 건, 보도를 통해 시위 참여자의 신분이 노출됐을 때 이들을 향할 온/오프라인상 성희롱과 모욕 등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각주:6] 한 트위터 이용자는 “촛불 시위 갔을 때는 누구에게 말해도 될 일이었고 모두가 나를 응원해줬고 옳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혜화역 시위의 경우 참가자들이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중무장하였고 주최측에서도 신상노출에 유의하는 온갖 지침이 내려오고 염산 테러 대비한 약품도 준비했다. 더 없이 옳은 시위임에도 욕을 하는 게 억울하다”라고 적었다. [각주:7] 시위 참가자들의 두려움을 피해망상이라고 여기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에게 ‘찍지마’하고 외치는 것을 더러 폭력적이라 할 수 없다. 혜화역 집회 당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염산 테러를 예고하는 글도 올라왔다. “옷 다 입었고 이제 나간다. 뉴스에서 보자 야븅이들아.”라는 글과 함께 염산을 손에 든 사진을 게시한 것이다. 앞서 진행되었던 강남역 2주기에도 집회 시작 전에 염산 테러를 예고하는 글이 올라와 주최측이 경로를 변경한 적이 있다. 한편 최근에는 커피전문점 이디야의 가맹점에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 여성 근로자가 혜화역 시위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회식 중 점주에게 “혜화역 시위에 갔었다”고 하자 “이제 출근하지 말고 알바 대신 중요한 시위나 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각주:8] 이처럼 소수자의 시위는 참여 그 자체로도 생존의 위협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개개인이 완벽해야 한다는 코르셋이 시위 참가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은 본인이 효과적인 메세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가 전체의 목소리로 일반화되어 소수자 집단이 비난/폭격을 맞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이러한 코르셋은 단지 개인의 감정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가 소수자 시위의 코르셋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을 때, 사회가 이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현상과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에서는 페미니스트 혹은 소수자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PC)을 앞세워 결함이 없는, 완벽한 도덕성을 겸비한 존재로 남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이들이 순수하고 완벽할 필요는 없다. 어떠한 개인도 완벽한 존재일 수 없기에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고쳐나가기 위한 시도만으로도 유의미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에는 즉각적인 비판과 성찰이 필요할 뿐이다.

 

공권력의 횡포도 두려움에 일조한다. 모든 시위 참가자들이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공권력을 통해 소수자의 목소리를 탄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권력을 떠올리면 계엄령이나 물대포로 진압하는 등의 모습을 상상하며 21세기에 무슨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냐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2010년 대에도 공권력이 개입하여 시위 참가자들의 생존에 위협을 가한 사례는 적지 않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촛불자동차연합[13]은 새벽까지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를 뒤따르며 경적시위를 함께 했다. 이에 일반교통방해(형법 제185조)와 야간미신고집회(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았고 운전면허 취소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강력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현장에서 경찰관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면허취소 처분을 한 것은 명백한 공권력 보복이었다. 면허 취소가 생계에 위협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면허를 취소 당한 이들 중 절반이 운전면허 없이 직장을 이어 가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촛불자동차연합’ 회원 김모(30) 씨는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거래처를 돌며 영업을 하는 일이라 운전면허 없이는 근무할 수 없기 때문이었고 운전면허가 취소될 것을 알게 된 회사는 약 보름간 그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이처럼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거리로 나온 소수자에게 국가폭력을 가한다.

 

한편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대 역시 국가폭력에 노출되었다. 지난 2009년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관련된 국정원, 경찰의 대책회의 문건이 유출됐다. 해당 문건에서 국정원은 엄격한 법집행을 검찰에 요구하겠다고 하였고 반대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 경찰이 동원될 수 있다는 실질적인 위협을 보이기도 했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이 비민주적 절차에 따라 강행된 것임에도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시위는 그저 불법행위로만 여겨졌고 공권력에 의해 탄압되었다. 실제로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개인 및 단체는 30억 이상의 구상권을 청구받기도 했었는데, 10년의 투쟁 끝에 구상권 청구 소송이 철회되었다. 이처럼 정부가 벌금형으로 생계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거나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연행함으로써 사실상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국가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공권력에 의한 탄압은 유신독재 시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위는 무릇 축제다

 

 

소수자의 시위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참여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참가자들은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참가자들은 시위가 가지는 축제적인 특징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한다. 시위를 생각한다면 투쟁적인 이미지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시위는 카니발(축제) [각주:9] 이기도 하다. 카니발은 모든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서로 소통하는 것이고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킨다. 시위도 카니발이기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는지, 어떠한 위치에 놓여있는 지 상관없이 서로 엉키며 힘이 될 수 있다. 올해로 19주년을 맞이한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는 당일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춤을 추기도 하고, 다양한 성정체성, 성적 지향을 가지는 사람들 사이의 결혼을 컨셉으로 한 퍼포먼스를 하며 기존의 이성애중심적 구도를 허물기도 했다. 또한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퍼레이드를 막기 위해 길거리에 드러눕기도 했지만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은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누운 사람들을 둘러싸 즐겁게 춤을 추며 기존의 권력관계에 억압받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카니발의 성격을 가진 시위는 일상 속에서 두려움으로,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는 혐오에 대해서도 함께 연대하며 저항할 수 있다. 퀴어문화축제 외에도 카니발적 성격을 지닌 시위에서는 다양한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4.3사건 70주년 추모제에서는 당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식용 개 반대를 위한 시위에서는 ‘장례퍼포먼스’ [각주:10] 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카니발을 즐기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금기 되어 왔던 도덕이나 권력에 대한 공포를 해학과 조롱으로 표현하며 억압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누리기도 한다. 올해 7월 7일 낙태죄 폐지 집회 구호에서도 국가권력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재미있게 풀어 내었다. 국가에서 여성을 인구통제의 도구처럼 여겼던 문구인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를 패러디하여 ‘덮어놓고 낳다 보면 내 인생은 폭망한다’를 시위 구호로 내세우기도 하였고 국가의 최고 권력기관인 헌법 재판소앞에서 동요를 개사하여 ‘헌재는 들어라(짝!) 여성의 목소리(짝!) 만장일치 찬성으로 위헌 선고해~’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 이처럼 카니발적인 시위는 두려움을 덜고 비판적으로, 동시에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긍정적인 양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또한 이는 웃음을 통해 힘을 얻도록,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 집회에서도 국민들은 권력을 조롱하며 승리를 웃음으로 만끽했다. 경찰 차벽에 대통령이 철장에 갇힌 모습의 그림과 ‘이러려고 의경했나’ 등의 글귀가 적힌 스티커를 도배하는 등 예술적인 방식으로도 함께했다.

 

시위 참가자들의 스스로에 대한 코르셋 역시 시위를 카니발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카니발에서는 단일한 목소리만이 들려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집단을 대표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부담감과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이중으로 갖게 된다. 하지만 카니발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주체가 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다. 카니발은 기존의 규범 아래 가려져왔던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다양한 이들의 삶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그렇기에 거리에서 나는 누구이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사회를 구성하는 데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함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 이는 하나의 진리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진리와 여러 개의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카니발은 혼잡하면서 질서 있고, 소란하면서 고요할 수 있다.

 

 

 

​[결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소수자들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할 광장에서조차 자유롭지 않다. 거리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혐오에, 그리고 위협에 노출된다. 이렇게 기울어진 광장에서는 소수자 운동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수 조차도 이들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 국가적인 대의를 위한, 다수자들의 시위에서 수는 곧 민주주의의 상징이며 참가하는 사람들은 시민의식을 가진 국민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소수자들의 시위는 그렇지 않다. 거리에 소수의 사람들만 나왔을 때에는 그 문제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혹은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요구로 여겨진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공감하여 연대하고자 거리로 나왔을 때에는 “한국에 ‘저런’시위에 동조하는 인간이 저렇게 많냐”는 반응이나 “자신의 능력을 쌓는데 투자해야 할 시간에 저런 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약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무지에서 비롯한 기만일 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과 같이 제도권 아래에서 목소리를 전하는 것은 다수자의 요구를 전달하기에는 유리하다. 하지만 소수자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기에, 아니 보려고 하지 않기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된다.

 

장애등급제 [각주:11] 와 부양의무제 [각주:12]  폐지를 외치는 이들도 처음에는 정치인에게 요구하거나 제도권 아래에서 해결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제도권에서는 들어주는 척하거나 유감을 표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이에 광화문역 지하도에서 장애인들은 5년간의 농성 끝에야 보건복지부 장관과 만남을 가지고 농성을 종료할 수 있었다. KTX 해고 승무원들의 복직 투쟁은 12년동안 멈추지 않고 지속했을 때, 해결의 가능성이 보였다. 퀴어문화축제는 19년차를 맞았지만, 성소수자 혐오는 여전히 만연하며 차별금지법과 같은 기본적인 제도도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는 이제 1350차가 넘었다. 위안부 문제는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투쟁으로 올해로, 25년이 넘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소수자의 시위는 장기화 되고 있기에 장기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수자 문제는 다른 중대한 사안에 비해 다소 사소하다는 이유로 밀려져 왔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전혀 사소하지 않다. 소수자 당사자들은 그 문제가 개개인의 삶 전부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장은 닫혀있는 공간이 아니라 열려있는 공간이다. 열려있다는 것은 누구나 와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구체적인 대안을 구상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연대할 수 있다. 퀴어퍼레이드에서는 수많은 ‘앨라이’ [각주:13] 들이 함께한다. 함께 광장에 나와 ‘앨라이’로 연대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도 힘이 될 수 있다. 광장에서 직접 그들을 마주할 때, 결코 그 문제가 사소하지 않은 것임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에서 함께 연대할 때, 서로에게 서로가 용기와 힘이 되어 보다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거리에서, 광장에서 소수자들의 부르짖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한 번이라도 거리로 나와서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떨까.

 

 

                                                                                           얀 (gmingi86@gmail.com)

  1. “몰카범이 여자라서 빨리 체포 주장에, 일부 여론은 지나친 페미니즘”, 시빅뉴스, 2018. 5. 22. [본문으로]
  2. 앞의 글. [본문으로]
  3. “[기자의 눈] 퀴어문화축제 보도의 편향성”, 크리스천투데이, 2018. 7. 19. [본문으로]
  4. 노출이 아니라 퀴어가 싫은 거겠지”, ㅍㅍㅅㅅ, 2015. 6. 3. [본문으로]
  5. 앞의 글, 페이스북에 올라온 노출에 관한 퀴어문화축제 측의 공식 입장 참조. [본문으로]
  6. 혜화역붉은 시위여성들 촛불시위 땐 다 응원해줬는데...”, 한겨레, 2018. 5. 21. [본문으로]
  7. 앞의 글. [본문으로]
  8. “혜화역 시위 갔다고 알바 잘리고, 페미 글 퍼날랐다고 징계 당해”, 중앙일보, 2018. 7. 10. [본문으로]
  9. 이 글에서카니발은 바흐친이 제시한카니발의 개념을 의미한다. 바흐친의 카니발은 전 민중이 광장으로 모여 웃고 떠들면서 일상의 지배와 규범을 전복하는 축제를 뜻한다. 한편, 카니발은 전복과 해체를 통한 구질서의 와해보다는 서로 다른 계층과 가치 체계를 극복하고 상호 배제가 아닌 조화로운 합일점을 모색하는 진정한대화의 장으로 기능한다. [본문으로]
  10. 복날에 진행된장례퍼포먼스는 식용개를 사육하는 농장에서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죽음을 맞은 개들을 추모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11. 장애등급제는 장애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등급을 구분 짓고, 차등적인 복지혜택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이는 장애인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낙인효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2. 부양의무제란 수급 대상자의 부모나 자녀에게 재산이 있거나 일할 능력이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제도이다. [본문으로]
  13. 앨라이란 본인과 다른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용어이다. 이때 앨라이는 비성소수자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