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3호> 어르신에서 틀딱충으로 - 노인혐오의 시대를 읽다_편집위원 서영

by yonseiji 2025. 12. 16.

 

 “늙은이들이 곱게 늙어야지, 추하게 저게 뭐야. 무식한 노인들이 시대가 바뀐 줄도 모르고...”

광장에 나와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에게 쏟아지는 말들은 원색적이고 간편했다. 확성기에 대고 ‘종북 척결’, ‘북진 통일’ 같은 구호를 연신 외쳐 대고,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안고 흐느끼며, 성조기까지 들고나와 흔들던, 일명 어버이 연합, 박사모, 가스통 할배 등으로 불리던 이들. 도무지 논리라고는 없으며 감정에만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때문에 종종 ‘그들만의 사회’에 갇힌 이질적인 존재들로 여겨졌다.

그러다 탄핵 선고 당일, 탄핵 반대 집회 현장에서 노인 네 명이 사망했다. 한 명은 소음관리 차량 스피커에 깔려 숨졌고, 한 명은 호흡곤란으로 숨졌다. 다른 두 명은 각각 동맥경화와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시위가 격해진 상황에서 쓰러져 숨을 거뒀다고 한다. 여론은 싸늘했다. “지들끼리 난리 치다 죽었다”, “훗날 독립투사였다고 뻥 칠 생각 마라”, “틀딱집회 수준 보소” 등이 사망 보도 기사의 ‘베플’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것이 ‘노망난 노인네들의 애국열사 놀이’에 내려진 평가였다.

 
지난 6월, 신분당선이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도 요금을 받겠다’고 국토교통부에 신고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다른 지하철 운영사들도 ‘노인 인구 증가로 더는 무료 승차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노인 대상 전액 무료 운임 제도가 도입된 지 33년 만에 본격적으로 존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언론사들은 노인 무료 탑승 때문에 매년 얼마나 큰 ‘손실’이 발생하고 누적되었는가를 앞다투어 부각해 댔다.

그런 기사에는 으레 다음과 같은 댓글들이 달린다. “노인네들 승차권 만들어 줄 때 개인 자산 전부 공개해야 함. 여름에 시원하니까 드라이브도 하고 좋지? 용서 안 됨”,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데...”, “노인츙오지게쳐타서개그켬”, ”무임승차  하시면서 자리까지 차지하는 노인분들 참 많아요 ㅎㅎ 돈은 젊은 사람들이 다 내는데...” “나이가 많은 건 벼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 때우려 지하철 타시는 분들. 출퇴근시간엔 제발 젊은 사람들에게도 자리 좀 양보해줍시다.” 등등.
하지만 노인 무임승차 손실은 사실 실제로 발생한 손실이 아니며, 회계상 반영되지 않는 ‘기대수익’일 뿐이다. 즉 ‘무료로 탑승하지 않았으면 받았을 것으로 예상하는 금액’에 손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해마다 무임 승객 비율이 큰 폭으로 증가하나, 적자액은 들쭉날쭉하므로 둘 사이에는 뚜렷한 관련성도 없고, 따라서 요금을 받는다고 해도 그에 비례하여 손실이 줄어드는 것도 아닐 것이다.[1] 가장 대표적인 경로 우대 정책에 손실이라는 이름이 붙고, 댓글들의 분위기는 냉랭한 것을 보니, 노인들의 ‘무임승차’ 이미지는 비단 지하철 무료 탑승 그 자체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2010년대 중반 무렵 ‘노슬아치’, ‘노인충’, ‘틀딱(충)’ 등 노인을 겨냥한 신조어들이 탄생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댓글 창을 중심으로 탄생한 이 말들은 주로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거나 무례하게 구는 노인들을 겨냥했으나, 거듭해서 쓰일수록 그저 노인 전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더 맛깔나게 표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10대~30대 이용자들이 모인 곳에서 꽤나 공감대를 얻으며 통용되며, 나름대로 ‘PC함’을 표방하는 곳에서도 별문제 없이 쓰인다. 어찌 보면 이는 수면 위로 올라온 세대 갈등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지표이기도 하다.
 

틀딱충의 탄생
 
‘노슬아치’는 노인과 벼슬아치의 합성어로, 나이 든 게 벼슬인 줄 안다는 뜻이다. 나이를 근거로 호령하는 노인들의 모습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때로는 기초노령연금 등 각종 노인 우대 정책에 대한 불평과도 연결된다. ‘틀딱(충)’은 노인이 말하는 모습을 틀니를 딱딱거리는 소리에 빗대어 희화화한 말로, 주로 극우적 성향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펼치는 이들을 조롱할 때 자주 쓰인다. 그 밖에도 노인충, 세금충, 무임충, 할매미·할아배미 등 여러 버전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고 활용도가 높은 것은 ‘틀딱’이다.

‘틀딱’은 권위/품위 있는 노인과 그렇지 않은 노인을 명확히 가려낸다. 즉 ‘무력하고 무식한’ 노인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아재’보다는 위 연령대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어딘가 믿는 구석 있는 ‘으른’이 이래라저래라 훈계하는 느낌인 ‘꼰대’와도 다르다.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기주장만 힘없이 외쳐 대기 때문이다. 아직도 옛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현대사회의 흐름에 한껏 뒤처져 있으며, 일각에서는 저들을 재사회화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병원비나 세금, 각종 우대 정책을 축내며, 말투나 행동은 느리고 우스꽝스럽다. 가는귀가 먹었는지 도통 말귀도 못 알아들어 원활한 소통에 제약이 있다. 정치성향은 보수 꼴통이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구글 연관 검색어로 ‘늙으면 뻔뻔해집니다’, 혹은 ‘늙으면 뒤져야지’가 뜨기도 한다.
 
노인에 대한 반감이나 비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이름은 반복적으로 쓰이며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고, 노인에 대한 거부감을 널리 퍼뜨린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지각하며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스스로 끌어낸다. 노인과 관련된 각종 ‘썰’들이 점점 더 많은 공감과 호응을 얻고, 도 넘은 비난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눈감게 된다. 더 재미있게 ‘틀딱’을 활용하는 사람이 더 많은 ‘따봉’을 얻어 베플을 선점한다. 댓글 창은 ‘누가누가 더 재미있게 욕하나’를 가려내는 각축장으로 전락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상관없는 기사들에 ‘이게 다 틀딱들 탓’이라는 뉘앙스의 댓글이 높은 공감 수를 얻기도 한다. 요즈음 자주 쓰는 말대로라면 ‘틀딱’은 계속 어디선가 ‘처맞고’ 있다.

먼저 등장했던 ‘병신년’, ‘김치녀’, ‘급식충’ 처럼 ‘틀딱충’도 이제 일반적 욕설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장유유서, 노인 공경 문화를 꽤나 오래도록 열심히 유지해 온 한국에서 ‘틀딱’의 등장은 꽤 특이하다. 웃어른을 대상으로 아무리 심하게 말해 봤자 ‘못된 영감탱이’, ‘고집불통 늙은이’ 정도가 다였기 때문이다. 노인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말아야 하던 나라에서, 노인 비하 단어가 성행하게 되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하, 차별보다 노인 ‘혐오’인 이유

‘한국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헬조선, 피로 사회, 계급 사회 등 다양한 진단명이 내려지게 되었다. 최근 두드러지는 것은 혐오 사회의 단면이다. 혐오란 구조적 차별, 즉 태어나보니 있던 차별이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특성 때문에 욕먹는 것이다. 구조적 차별이라 함은, 사회·문화적 경험을 통해 구성원들의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켜켜이 쌓이고 돌처럼 굳어 좀처럼 바뀌기 힘들다는 뜻이다. 2015년경 부상한 이슈인 ‘여성 혐오’와 함께 ‘혐오’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고, 그와 함께 이제껏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했던 사회적 폭력의 지점마다 새로이 혐오라는 이름표가 부착되었다. 살면서 경험했거나 당해 왔던, 그저 개인적인 일로만 치부되던 폭력들이 비로소 모두의 문제로 이야기되기 시작했으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들도 ‘그것은 혐오에 의한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일깨우는 것이 그나마 가능해졌다.

혐오는 차별이나 불평등보다 어감이 세며, 감정적 영역의 단어다. 그 때문에 용어 사용의 과정도 순탄치 않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꽤나 오래 걸리기도 했다. 혐오 상황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는커녕 공감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어쨌거나, 연속해서 혐오 범죄들이 발생하고 곳곳에서 혐오 표현이 즐비한 상황에서, 그것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는 것에 이제 조금 더 많은 이들이 동의하게 된 듯하다.

혐오 표현은 개개인들의 단순한 감정 배출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발화됨과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상처를 주는 말이며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중요한 것은 발화된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개시하는 역사적 층위, 다시 말해 발화의 수행을 통해 작동하고 있는 인용과 반복, 그를 통해 출현하고 반복되는 권력 관계이다.”[2] 라 이야기했다.

혐오는 분노 혹은 비판과 구별되며, 때로는 그 탈을 쓰고 위장하기도 한다. 혐오가 위험한 이유는, “특정한 집단을 순수하고 깨끗한 ‘우리’와 분리하면서 그 집단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주된 논리로 이용되어왔기 때문”[3]이다. 즉 어떤 대상과 거리를 두고 경계선을 그으려는 것이 혐오의 주된 방향이 된다. 혐오는 행위의 부당성이 아닌, 그 행위를 범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감정이다. 따라서 혐오는 낙인 찍힌 이들의 발언권을 막으며, 재미난 오락거리로 소비될 때만 주류 사회로의 편입이 허용된다. 즉 주류논리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편입’시킨다.

노인 개개인들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감정과 기억들이 마치 노인 집단 전체의 특성인 것처럼 호도되고, 원활하게 유통되는 상황은 우리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그리고 있었는가를 명백히 보여 준다. ‘틀딱’의 남용은 우리의 판단을 희미하게 하며, 그것이 가져오는 변화는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잠재적으로는 유해하다. 특히 혐오를 기반으로 한 반지성을 자랑 삼는 일베식 사고방식이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한국 사회에서는 말이다.
 

‘틀딱’은 무엇을 말하는가
 

 

‘틀딱’에는 ‘잉여 인간’에 대한 분노가 담겼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정상 노동력’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밖에 놓인 이들을 비생산 인구로 분류한다. 의존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잉여 인간'은 타인과 제도에 기대는 것처럼 보이므로 쉽사리 공격 대상이 된다.

반복되는 경제난과 취업난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이 기구하다 느끼고, 더욱이 분노를 표출할 곳도 마땅치 않을 때 혐오가 즐겨 발생한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긋난 분노가 ‘세금의 혜택을 보며 빈둥빈둥 노는’ 이들, 각종 우대 정책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 대한 공격과 시비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분노는 ‘무임승차’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시선을 집중시키며, 실제 그들이 겪는 고통은 말끔히 지운다. 언론은 앞장서서 그러한 이미지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가뜩이나 힘든 상황 속에서 부양까지 해야 하는 이들의 존재는, 경제활동 인구의 나약한 등을 짓누르는 짐짝처럼 묘사된다. 사회적 약자로 상정된 이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마련해 주려는 시도마다 등장하는 ‘불공평하다’, 심지어 ‘역차별이다’ 등의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은 이와 맞닿아 있다.

최근에는 고령 인구 일자리 증가가 이슈로 떠오르는데, 꼭 청년의 일자리에 대한 우려가 함께 언급되고 대비되곤 한다. 청년의 일자리를 뺏을 것으로 우려되는 집단으로 종종 묘사하는 것이다. “일자리 '세대 불균형'…노인은 느는데 청년은 '바늘구멍'”, “청년 취업자 수 뛰어넘었다…'일하는 노인' 역대 최다”, “일하는 노인, 쉬는 청년…2분기 취업자 수 격차 22만 명”같은 머리기사를 보면 왠지 노인들이 청년의 일자리에 침투해버린 것만 같다.

자신의 빡빡함을 토로하는 푸념이 담긴 분노는, 한국의 다른 혐오들을 만드는 주된 재료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며, 그와 동시에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퇴화한다. 여러 복잡한 맥락들은 삭제되고 오로지 ‘저들이 꿀을 빤다’, ‘세금 낭비’ 따위의 비난에 바로 뛰어드는 것이다. 푸념 담긴 분노는 현실과 맞물렸을 때 꽤 논리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선동한다. 혹은 단순히 ‘불쌍하다’라거나, ‘나는 어떻게 살지’ 혹은 ‘나는 저 정도 아니라서 다행이다’와 같은 자기 위로의 재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무력하고 무식한 노인을 겨냥한 ‘틀딱’은 유독 노인의 무지몽매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박사모, 어버이연합에 소속된 ‘못 배운’, ‘무식한’ 노인들의 모습, 늙어서 판단능력이 흐리기에 가짜뉴스에 현혹되고 한 가지 논리에만 매몰될 수밖에 없는 가엾은 노인들의 모습들은 꽤나 잘 팔리기 때문이다. ‘틀딱’을 내뱉는 입은 ‘우리’와 ‘그들’을 각각 우와 열의 관계에 위치시킨다. 노인들은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반문화라기보단 문화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비문화로 분류된다. 그들의 사회는 쉽게 부정당하며, ‘투표권 뺏어라’ 와 같은 주장을 통해 적절한 국민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이들로 격하된다. 촛불의 힘으로 일궈 낸 깨어 있는 시민들의 ‘성숙한’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미숙하고 뒤처진’ 이들은 지워지는 편이 깔끔했다.

 
또한 ‘틀딱’을 중심으로 한 노인 혐오 담론은 유독 죽음과 강력히 연관되어 있다. ‘뒤져라’, ‘병 걸려 죽어라’, ‘치매 노인들 말살시켜라’, 그리고 이 모든 걸 포괄하는 ‘늙으면 뒤져야지!’라는 말은 다른 집단에 대해 혐오의 말을 뱉을 때보다 더 자주, 가볍고 쉽게 쓰인다. 죽을 나이에 가까워진 이들이니 어차피 죽어도 덜 손해인 셈인가. 앞서 언급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사망한 노인들에게, ‘그러게 다 늙어서 왜 시위에 나오냐’, ‘집에나 있을 것이지’라거나 심지어 ‘잘 죽었다’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였다. 어떤 생명은 열사 취급되고, 어떤 생명을 두고는 죽어도 되는 존재라는 말이 쉽게 오간다. 때로는 마치 벌레를 속 시원하게 눌러 죽인 것처럼 쾌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한국-노인 혐오
 
한국은 특수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녔다. 이때 정치적 이데올로기란 사고의 틀을 짓는 가장 밑바닥의 전제를 구분해주는 기준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라 했을 때 우리는 흔히 공산주의, 자유주의 등을 떠올리지만, 그보다는 역사 경험이나 인간 정의나 공공의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신념을 갖고 행위를 구성해 나가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4]

과연 한국의 ‘국민 되기’ 과정은 독특했다. 해방 후 분단국가가 수립되는 과정과 이어지는 전쟁의 과정에서 오랜 시간 상당한 굴곡과 파탄, 갈등을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와 ‘타자’를 문명과 야만인 양 경계 지어왔다. 눈을 부릅뜨고 ‘빨갱이’를 색출하고 잔인한 학살까지 자행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낙인은 곧 공포였으며, 조금이라도 다른 기미를 보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 속에서 ‘어떤 부류의 인간인가’로 죽어도 되는 목숨과 죽어서는 안 되는 목숨으로 나뉘는 경우들이 반복되었다. 왜곡된 분배 구조를 동반한 속도 빠른 경제 발전이 시작된 후에는, 도시화와 개발에 대한 열망이 낙후된 곳을 지정하고 계속해서 지워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단기간에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와 열을 신속히 가려내야 했다.

그것은 오래도록 쌓여왔고, 지속해서 효과를 발하고 있다. 특정 부류에 대한 범주가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범주가 곧 정상성이 되고, 그 위에서 구축되는 사회 질서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 있다. 100% 깨끗한 커뮤니티를 바라는 것,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 하지 않는 것, 커뮤니티의 자연스러운 혼종성을 오염으로 인식하는 것, 특정 집단에 공적인 정체성을 불어넣어 정치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 또한 그렇다.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 혹은 ‘공경하올 어르신’과 대상화된 ‘틀딱’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이 흐르게 된다.


 고령화, 안전망 상실

‘틀딱’은 가뜩이나 구석에 몰린 노인을 더 깊은 구석으로 내몬다. 노인들은 왜 광장에 나왔을까? 상상 속 노인이 아니라 모든 안전망을 상실한 상태의 현실의 노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노인이 이상적인 고령자의 삶은커녕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상태다.

한국 노인의 절대다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2012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한국 노인의 상대 빈곤율은 49.3%로, OECD 회원국 가운데 2위인 아일랜드에 비교해 현저한 격차를 보이며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상황에서 한국은 내년(2018년)부터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를 초과하게 되면서,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고령사회 선배 격인 일본의 상황과 비교해선 안 된다. 평균적인 일본 노인은 부자 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노인에게 부자 이미지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으나, 소수의 부자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5]

한국 사회는 너무나 무방비하다. 퇴직 연금은 부족하고, 생활 부담과 스트레스로 인한 가족 해체 현상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섰다. 각종 노인 문제가 한국사회의 중대한 해결 과제로 떠올라 있지만, 여전히 노인 구제 이슈들은 당위론으로만 존재한다. 각종 위험에 처한 수많은 노인을 구제할 인식 기반과 정책 대응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틀딱’이 유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노후 빈곤의 참상이 ‘틀딱’ 앞에서 너무도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혐오는 그것이 가는 길 자체를 곧 목적으로 삼는다. 차별을 위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이 바뀔 때마다 능숙하게 모습을 달리한다. 최근 발생하는 노인 묻지마 살인, 노인요양시설 설립 거부, 무임승차에 대한 ‘손실’ 지적 등이 ‘틀딱’과 연관성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가며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민주주의’라는 말이 강조되고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이 속에서 혐오의 말들이 넘치는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혐오는 타인을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서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민주사회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시민 의식을 강조하기 이전에 먼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종종 ‘진리’가 마치 유일무이하며 일방통행만 고수해야 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애초에 진리가 가진 가장 큰 특성은 복수성이다. 내가 속한 문화가 아니면 전부 비문화처럼 여기는 굳어진 사유 안에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깨끗하고 이상적이고 아름다우며 균질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혐오는 시작된다.
 

독일의 철학자 바흐친은 “그 어떤 문화도 그 어떤 문화에 의해 그 고유한 정체성을 정의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어떤 문화도 완전무결한 상태에 있지 않으며, 흐물흐물한 경계상에 놓여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정체성은 자신의 개인적 체험, 성장 환경, 삶의 인식들이 모여 만들어진 고유한 특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하며, 사회 통념에 의해 자연스럽다고 규정된 것과는 달라야 한다. 따라서 정체성을 규정하고 못 박는 것은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규정된 정체성은 때로 정상성인 것처럼 쓰인다. 사회적 질서와 규범 속에서 만들어진 정체성,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정체성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틀로써 작용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향해 죄책감 없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라고 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정체성을 이탈한 정체성으로 취급한다. 정체성을 멋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대상을 공허함, 무력감, 혼란스러움으로 무책임하게 밀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노인 혐오 현상이 청년층, 특히 20대를 중심으로 퍼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기도 하다. 혐오 표현의 생성과 적극적인 유통 모두 청년 세대가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기반이 되었다. 노인에 관한 글을 굳이 <연세>에 싣고자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 대선은 최초로 ‘세대 갈등이 지역 갈등을 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도 2030 세대와 60대 이상 세대가 지지하는 후보가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분명 노인과 청년 사이 어떤 괴리감은 존재한다. 하지만 대립한 상태일수록 서로를 비춰보아야 조화로운 합의점을 지향할 수 있다. 괴리감을 혐오로 풀어내는 방식은 본질과 어긋나 있다. 잠잠함보다는 역동성을 꾀할 필요가 있으며, ‘틀딱’의 쓰임에 대해 고민하는 것에서 그 역동성은 출발한다. ‘틀딱’을 비롯하여 ‘노인은 거추장스러운 짐이다’라는 프레이밍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게 될지는 분명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영/oksusu.lover@gmail.com
 


[1] “'노인 무임승차'가 지하철 적자 주 원인?,” JTBC,  2017년 6월 21일

[2] “언어적 수행으로서의 혐오,” 「문학과 사회」, 강동호, 116(2016), p. 10에서 재인용

[3] “혐오는 왜 도덕적 감정이 될 수 없는가,”「문학과 사회」, 이경진, 116(2016), p. 7.

[4]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2017-1 ‘현대사회와 정체성’ 수업 中

[5]「2020 하류노인이 온다」, 후지타 다카노리, 청림출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