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왜 언제나 평등할 수 없나
올해의 퀴어문화축제에는 약 7만 명(주최 측 추산)의 인원이 참가했다. 궂은 날씨에도 ‘퀴어대명절’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제는 그토록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퀴어문화축제의 애프터파티는 그 열정에 어울릴 만큼 감동적이지는 못했다. 애초 참가 인원 모두에게 20,000원의 동등한 가격으로 티켓을 판매했던 주최 측과 달리, 애프터파티 공간을 제공한 게이 클럽 ‘펄스’에서는 갑작스럽게 여성에게만 50,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을 제시해 문제가 되었다.
차후 파티기획단장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과문이 게재되었고 1 피해를 본 ‘여성’들에게 차액 보상이 지급되기는 했지만, ‘퀴어문화축제는 대체 퀴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냐’, ‘애초에 외관으로 성별을 판단하는 것부터가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게이 클럽의 성별 차등 가격이 게이 집단 내의 여성 배척을 상징한다는 지적도 다수였다.
이러한 논란을 점화시킨 펄스 사건 자체는 오해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나, 피해 당사자들이 이 일을 행사 진행 중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성 차별이리라 생각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수자 간의 관계 맺기에서도 필연적으로 위계와 차별은 발생한다. 과거부터 누적된 경험이 이들을 분노하게 했을 것이다.
‘의도치 않은’ 차별이 가시화되고 책임자의 공식 입장을 끌어낸 것은 이번 퍼레이드가 처음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퀴어퍼레이드를 처음 참가했을 때부터 항상 의문이었다. 과연 이 퀴어대명절은 모두를 위한 명절이 맞는가.
내가 느끼기에 2016 퀴어퍼레이드는 퀴어가 아닌 ‘게이퍼레이드’ 같았다. 부스 중 압도적인 수가 남성 동성애자만을 대상으로 상정했고, 참가자 중에서도 지정성별 남성이 훨씬 많았다. 자연스럽게 남성 퀴어가 가장 당당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제된 것만 같았다. 나는 LGBTAIQ…의 범주에서도 발언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가장 평등하고 싶었던 공간에서 깨달았다.
평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퀴어 담론에서 늘 가장 중요하게, 가장 시끄럽게 다뤄지는 것은 남성 동성애자 이슈라고 느껴왔다. 퀴어퍼레이드 반대 집회에서조차 “동성애자 축제 반대한다”는 피켓을 든다. 왜 바이섹슈얼,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 에이섹슈얼을 비롯한 다른 퀴어들은 이렇게 보이지조차 않는 거지? 왜 게이 이외의 삶은 여기서조차 비가시화 되지?
‘우리는 우리만 챙긴다’
나와 같은 ‘게이 이외의 삶’이 존재를 드러낼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여성 및 소수자 운동에서 이미 어느 정도 위치를 선점한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혐오를 지적하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밖이 아닌 안에서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연대해도 모자랄 판에 왜 우리끼리 싸워요, 싸우지 마세요”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 소수자 간의 관계 맺기에서도 충돌은 일어나고, 단지 사회적 소수자라는 넓고 느슨한 범주에 함께 속해있다는 것만이, 서로에게 당연하게 협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이 잡음을 통해 언젠가는 더욱 성숙한 관계 맺기가 가능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혼란이 마냥 건강한 논쟁만을 수반하고 있을까?
펄스 사건에 뒤따른 논쟁이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듯이, 게이와 여성, 흔히들 협력 관계에 있겠거니 생각되는 두 집단의 사이는 이제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게이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위한 공간을 시스젠더/헤테로/퀴어 여성과 공유하는 것을 막고자 가격 차등을 두어 왔다. 이러한 가격 차등은 어찌 보면 배척이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한’ 소속감과 아웃팅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책으로 작동하는 장치다. 레즈비언 클럽도 마찬가지다 2 . 다른 성 정체성/지향성을 가진 이들에게 입장을 지양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조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인증’ 등의 방식으로 적용된다.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두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보호와 배척의 선을 넘어 혐오의 담론이 힘을 얻고 있다.
직접적인 대립 구도의 시작은 온라인 게이 커뮤니티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언어가 적발된 후부터였다. ‘뽈록이’(여성을 가슴 그 자체로 치환하는 표현), ‘끼순이’(애교 등 고전적 여성성에 익숙한 사람), ‘뒷보지’ 등 여성성을 강조한 비하 표현이 오랫동안 쓰인 사실을 지적한 여성들은 이내 게이를 겨냥한 미러링을 시도했다. 게이의 성행위나 사기 결혼 등을 비난하는 글을 줄줄이 쓰기도 하고, ‘똥꼬충’ 등의 어휘를 만들어내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요즈음 20~30대 여성이 이용층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형 여초 커뮤니티들에서 여성 관련 의제에는 긍정적이고 일관된 흐름의 공감성 댓글이 달리지만, ‘동성애자 육군 A 대위 구속’이나 ‘퀴어퍼레이드 참가자 개인정보 침해 문제’ 등의 뉴스에는 ‘너희 일은 너희가 해결해’ 식의 반응이 대다수다. ‘아무리 성소수자라도 여자들한테만 부탁하는 것은 비겁하다’, ‘시스젠더 헤테로 한국 남성이 원흉인 것을 우리도 다 아는데 왜 여성 커뮤니티에서만 징징대냐’, ‘여자가 더 잘 동조해주리라 생각하고 화력 3 만 지원 받으려고 오는 얄미운 행동이다’ 등등.
커뮤니티로 게이 인권 관련 뉴스를 들고 오는 유저들이 정말 ‘지원 화력이 필요한 게이’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그들이 원한대로 예전처럼 ‘게이-프렌들리’한 피드백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대형 게이 커뮤니티들의 여성혐오가 발각된 후부터 페미니스트들의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실망과 경계가 한껏 높아진 탓이다.
물론 게이 및 소수자 배척의 기류가 그 표현들에 대한 대응으로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우리는 우리끼리 챙겨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유구한 역사가 있다.
여성 집단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들이 사회에서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을 지켜봐 왔다. ‘반정부’, ‘반체제’, ‘반자본’의 대의와 명분을 동력으로 삼은 운동,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는 남성에 의해 여성의 문제는 항상 사소한 것으로 취급당했다. 4 1980~90년대의 노동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여성 착취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2004년, 2008년, 2016년의 촛불 집회에 이르기까지도 적극적으로 동참한 여성들은 집회마다 성차별, 성추행, 대상화의 경험만 누적되고 여전히 아무도 그들을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현실을 마주했다.
이 익숙한 상황에 대한 반감이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만 챙겨야겠다’는 전략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대의, 옳은 것, 더 중요한 일을 내세우며 주도적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고자 하는 남성 집단에 대한 반감이 여성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이런 반감은 메갈리아-워마드 5 의 분화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한국 남성 일반에 대한 반격이 한창 시작되던 2015년 중후반이었다. “오직 ‘여성인권’만을 위한 커뮤니티”라고 공표한 워마드를 필두로 일부 여성들은 자신을 사회적 소수자라고 말하는 모든 남성에게 언어폭력을 가했다. 소수자를 겨냥한 다소 원색적이고 비하적인 혐오 표현에, 공격받은 당사자들이 “진짜 페미니스트는 이렇지 않다”고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워마드가 스스로 ‘페미니스트 커뮤니티’로 명확하게 호명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들은 교차주의 페미니즘 6 의 노선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커뮤니티 공지사항 제1번에는 “게이꿘/연대꿘/동물꿘/장애꿘/정치꿘/채식꿘 등등 각종 꿘충 7 안사요 안사”라는 명확한 배척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들은 성소수자, 장애인, 정치적 진보층, 채식주의자, 그 어떤 소수자라도 지정성별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젠더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특혜를 누려왔음’ 8을 지적했다. 또한 자신들의 여성혐오와 성차별 인식은 성찰하지 않은 채로 소수자 인권에 대한 존중과 도움을 요구하는 ‘남성’들과는 연대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이것이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유명한 발언에 대해 “나는 해일이 몰려와도 조개를 줍겠다”를 넘어 “우린 여자만 챙긴다”고 맞서 외치게 된 배경이다. 예전부터 유독 모두를, 관용적으로, 잘 챙길 것이 기대되던 페미니스트 집단이 “페미니스트라면 이것도 공감해달라”는 대가 없는 요구에 드디어 반기를 든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현 시점에서 이와 같은 ‘한남 소수자’, 특히 ‘한남 게이’ 혐오가 워마드 하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급된 대로 대형 여성 커뮤니티의 대부분이 ‘똥꼬충’, ‘에이즈충’ 등의 비하 표현을 적극적으로 생산해내고 유희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중 대다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기 정체화가 완료된 사람이거나, 적어도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자각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똥꼬충’은 ‘한남의 외형으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소수자 방패로 여성들의 가진 것까지 뺏어가려고 하는 한국 게이들’에 대한 정당한 표현이다. 한국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결국 ‘한국의 남성’일 뿐이며, 가부장제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체화한 지정성별 남성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성별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하면 일면 타당하나, 그렇다고 해서 똥꼬충 등의 표현을 용인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게이 남성의 ‘한남스러움’을 미러링(mirroring)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성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체화한 여혐을 지적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았어야 한다. 에이즈충도 마찬가지로, 모든 에이즈 환자들이 동성애자이며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발병한 것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오직 동성애자 비하만을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다. 미러링은 그 방향이 확실한 강자인 시스젠더-헤테로 남성을 향했을 때는 전복적 의미를 가지는 무기였으나, 다양한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관계에서는 더 조심스레 다뤄져야 했다.
나름의 페미니즘 감수성을 갖춘 여초 커뮤니티들에서 ‘똥꼬충’ 등등이 이토록 보편적인 유희가 되기까지, 분명 성소수자 비하와 배척을 경계하자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그들을 커뮤니티 공감대에 맞지 않는 이방인으로 치부했고 그런 목소리들은 결국 내쫓기거나, 내집단에 안전하게 남기 위해 침묵하게 되었다.
한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를 드러내놓고 비하하게 된 이 상황에 이르기까지는, 가부장적 구조 내의 남성이 여성보다 권력을 갖듯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이성애자로서의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을 갖는지 성찰하는 과정이 불충분했다. 똥꼬충, 에이즈충,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등의 말들은 여혐에 대한 미러링이 아니라 이성애자의 동성애자를 향한 폭력에 더 가깝다. 이것은 어쩌면 의도적인 몰이해다. 그 자신의 삶이 어떻게 억압받아왔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본질적인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방식으로 억압받는 사람에게 또 다른 혐오를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진짜 여자는 아니잖아
‘진짜 여성’들의 퀴어 혐오는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비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게이와 여성의 긴장 관계 같은 맞불작전보다도 일방적인 린치로 느껴지기에 더 심각하다.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mtf 9 /트랜스여성을 가혹하고 배타적인 태도로 다루며 그들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mtf/트랜스여성이 주로 마주하는 비난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mtf 트랜스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성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이 있다. mtf들 중 일부가 흔히 여성적이라고 칭해져 왔던 말투와 모습 등을 체득하고 드러내는 행위가, 여성과 여성성을 대상화하고 성역할을 고착화하는 데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평생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경험이 누적된 ‘진짜 여성’의 삶과, 남성으로서 거저 주어지는 특권은 다 누리고 살다가 외과적/인공적 여성성을 얻은 mtf 트랜스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가장 원초적이고 이해도가 낮은 비난 중에는 ‘가지고 태어난 성을 거부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는 단지 복장도착증이거나 정신병의 일종일 뿐’이라는 것도 있다. 트랜스젠더와 정신병자의 합성어인 ‘젠신병자’가 새로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직접적인 혐오 발언뿐만 아니라 ‘실좆’ 등 남성의 여혐 표현에 대한 미러링에서도 트랜스 배제가 성립될 수 있다. 의도적 배척은 아니더라도, 여성의 대응은 남성, 여성 성기의 대응은 남성 성기라는 이분법을 전제로 한 이 표현은 인간의 젠더를 외부 성기로만 환원해 고려하게 한다. 이와 같은 방식은 성별 이분법으로 확실하게 나눠지지 않는, 경계에 선 존재들을 사고에서 지워버린다.
이 발화들은 단지 커뮤니티나 SNS에서만 시작되고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10 등 당대의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의 “트랜스 여성은 트랜스 여성일 뿐” 등의 발언에 더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들은 옳지도, 유효하지도 않다.
mtf 트랜스여성들이 기존의 전형화된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하고자 하는 모습은 분명 페미니스트에게 딜레마이다. 그들이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그 여성상은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전통적 여성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식기와 외형만으로 자신의 성이 패싱 11 되는 사회에서, 부여받은 지정성별과 성 정체성이 다른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트랜스젠더 중 모두가 성전환 수술과 호르몬 투여를 원하는 것도 아니며, 옷만 바꿔입었다가는 자칫 크로스드레서나 드랙퀸으로 오인당하기도 한다.
트랜스여성을 ‘진짜 여성’과 분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정체성 혼란은 단지 ‘어릴 때부터 치마를 입고 싶었어요’라는 말만으로 정당화되나요? 그것은 너무 여성혐오적입니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여성의 외형’이라고 읽히는 요소들이 아직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시스젠더 여성조차도,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대로 호명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젠더기표를 표출한다. 트랜스섹슈얼들에게 여성의 옷차림, 화장, 긴 머리를 넘어 표정과 제스처, ‘여성적’ 행동을 익히는 일은 성정체성의 고민과 확신만큼이나 중요한 젠더수행의 방법이다. 12 자신이 원하는 성과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성 사이의 충돌을 지우는, 포기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들에게 여성성은 ‘과잉 수행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젠더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없다는 말도 트랜스 여성의 삶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가끔 그런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비트랜스젠더로서 트랜스젠더에 비해 자신이 갖는 권력을 의식하지 못한 것만 같다. 과연 mtf들이 단순히 여성성을 흉내 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회적 차별을 감수하고 막대한 돈을 들이는 것일까. 물론 태어나서 자연히 따라오는 특권을 누릴 수는 있었겠지만, 그들이 과연 그 특권을 원했을지도 의문이며 퀴어로서의 내적 갈등과 정신적·물리적 피해를 겪었을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지정성별 남성이라는 점만으로 그들의 삶을 시스젠더 남성과 동치시켜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mtf를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부유하는 그들의 존재는 어디로 가야 할까? ftm은 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여성인가 남성인가? 실제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담론에서 mtf가 ‘가짜’로 취급 당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ftm은 ‘배신자’로 치부되거나 아예 못 본 척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트랜스젠더 퀴어들은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역할을 맡게 된다. 단일한 주체의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비트랜스젠더 여성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보며 자신은 ‘원본’이며 자궁이 있는 진짜 여성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13 그러나 과연 ‘진짜 여성’만을 가려내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을 솎아내고, 경험을 평가절하하고, 혐오 발언을 재생산하는 이 방식이 건강하고 유효한 전략인지 이제는 재고해볼 때가 되었다.
벽 밑에서, 다시 위를 보라
진짜와 가짜의 분리를 외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이미 교차성 의제는 배척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트랜스젠더퀴어 논란에서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듯, 그들은 의도적으로 ‘여성만 챙기기 위해’ 복합성을 무시한다. 다른 소수자의 인권을 ‘오지랖 넓게도’ ‘챙겨주려’ 하는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쓰까페미14’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조롱당한다.
내가 ‘똥꼬충’을 보며 이 다음 타겟은 내가 되지 않을까 불안해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고, 내가 생물학적으로 부여받은 몸에 완벽하게 만족하는지 때때로 확신할 수 없으며, 나와 같은/다른 젠더를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바이섹슈얼이다. 어떻게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교차적 요소들을 무시하고 나라는 사람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여성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과 같이 젠더 퀴어, 바이섹슈얼 집단에도 소속감을 느끼며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퀴어에게 일종의 유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게이를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진짜 여성’만을 동지로 받아들이는 듯한 사람들이 다음에는 나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올해의 퀴어문화축제를 비교적 즐겁게 다녀온 편이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광장을 함께 누비고 행진을 함께 한 사람 중 누군가는 집에 가서 ‘똥꼬충’을 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헤드윅>이나 <꿈의 제인>의 주인공들은 너무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들의 삶이 그 모든 아름다움을 무시당하고 트랜스 여성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무조건적인 비난을 마주할까봐 겁이 났다. 현실에 존재하는 헤드윅과 제인이 걱정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의 불안을 느낀다. 누군가 말했듯 내 인권을 반으로 나눌 수는 없는데 여성이자 퀴어인 나, 온전히 하나인 나는 갈 곳이 없다.
내가 ‘쓰까페미’인 이유는 사실 대단한 PC함을 추구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 특정한 경험을 갖고 특정한 범주에 속하기를 요구받는 사람들. 여성 차별에서 나를 지키고 싶다는, 더 이상 억압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여기도 더는 안전하지 않다.
결국 시스젠더-헤테로 남성만이 정상이자, 표준이자, 우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구조가 문제라는 것은 다들 안다. 알지만 가부장제가 세운 벽은 오래도록 너무도 공고해서, 그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벽을 깨트리던 사람들은 잠시 지쳤으리라. 누군가가 진정한 자기 편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공격의 방향을 위가 아닌 옆으로 트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다 같이 벽 밑의 사람들이다. 하물며 여성들 각각의 경험도 삶의 궤적에 따라 다 다른 마당에 ‘진짜’ 여성을 가려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이라 겪는 일을 여성의 언어로 풀어내는 발화의 시도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의 자격을 자꾸 검열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방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나는 여성을 위해서, 성소수자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가 그런 검열과 배척의 늪을 어서 빠져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참고
나영, “‘페미호’의 노를 함께 저어가기 위하여”, 중앙문화, 2017.06.27
루인 외,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현실문화, 166~223쪽
루인, “보슬아치와 실좆은 미러링 관계인가”, 한국여성학회 2015 여름 캠프 강의자료
스톤, “게이와 페미니즘: 가깝고도 먼, 어쩌면 살얼음판 같은 관계에 대해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랑’>」
한영희, 「젠더사회에서의 트랜스젠더 읽기」, 문화과학
- https://www.facebook.com/PrivateBeachKR/posts/1799773833686644. 퀴어문화축제 주최 측은 펄스 클럽을 12시 30분까지 공식적으로 대관하였으나 펄스의 배려로 그 이후에도 축제가 이어질 수 있었고, 입장료 또한 퀴어문화축제 측과 협의한 그대로 유지하기로 협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클럽 입장 관리 직원과 약간의 소통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본문으로]
- 물론 레즈비언 클럽에서는 남성의 출입을 완전히 금지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게이 남성과 여성 고객의 경우와 다르게, 레즈비언 여성들은 퀴어든 아니든 남성 고객의 입장 자체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 [본문으로]
- 화력: 온라인에서 한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사이트에 댓글 도배 등의 공격을 가하는 속도. 커뮤니티 자체의 영향력과 회원 수를 드러내는 지표로 주로 쓰인다. 여론의 흐름을 빠르고 강력하게 선점할수록 화력이 강한 것. ‘좌표’를 찍어두고 “이 글에 화력 지원해달라”고 서로 요청하는 경우가 잦다. [본문으로]
- 나영, “‘페미호’의 노를 함께 저어가기 위하여”, 중앙문화, 2017.06.27. http://cauculture.net/?p=2877 [본문으로]
- 워마드: "오직 지정성별 여성 인권"만을 위한 커뮤니티를 표방하며 실질적으로 (대외적 차원과 미러링 전략 차원에서) 페미니즘 커뮤니티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논바이너리 젠더퀴어,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성격을 띠고 에코 페미니즘에도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교차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래디컬 페미니즘,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페미니즘, 분리주의 페미니즘 등을 표방하며 특정한 페미니즘 갈래에 완전히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페미위키) [본문으로]
- 교차주의 페미니즘: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젠더, 인종, 사회 계급 등 다양한 측면이 상호교차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말하는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이론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의 한 갈래. (페미위키) [본문으로]
- ‘OO꿘충’은 진보계열 운동권이 여성 집단의 ‘화력’을 이용해 특정 의제를 자신들의 뜻대로 끌고 가려고 한다는 경계에서 출발한 말이다. 현재는 운동권뿐만 아니라 동물권, 채식주의, 성소수자 등 연대를 요구하는 모든 집단에 대한 비하 표현으로 쓰인다. [본문으로]
- 나영, 앞의 글 [본문으로]
- mtf: male to female transgender의 약자. 지정성별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의 성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 mtf와 ftm(female to male)을 묶어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저자, 나이지리아 출신의 여성 작가. ‘트랜스 여성도 여성인가요?’라는 질문에 트랜스 여성의 경험은 시스젠더 여성의 경험과 다르다고 단언함으로서 많은 비판을 샀다. 관련 기사: Noah Michelson, “페미니스트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트랜스 여성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이다”, 「The Huffington Post」, 2017.03.13, http://www.huffingtonpost.kr/2017/03/12/story_n_15324090.html [본문으로]
- passing: 어떤 사람의 외적 모습이 사회에서 특정한 성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본문으로]
- 한영희, 「젠더사회에서의 트랜스젠더 읽기」, 문화과학, 96쪽 [본문으로]
- http://lgbtpride.tistory.com/1384. 조나단, “[제 9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페미니스트 인더 미러, 혐오를 허하라?: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랑’>」, 2017 [본문으로]
- 부산 사투리인 ‘스까’(섞어)와 페미니스트를 합친 신조어. 교차주의 페미니스트를 주로 가리킨다. 여성 인권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 의제에도 관심을 두고 공감과 연대를 시도하는 페미니스트를 ‘뭐든 다 스까(섞어)먹으려고 한다’며 비난할 때 쓰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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