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또 여성인가
"앞태랑 뒤태랑 다르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말의 천박함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화살이 ‘선생님’이란 이름으로 선 사람을 향했다는 건 더더욱. 한 어린이평화캠프에서 교사로 자원봉사를 할 때, 동료 교사가 코앞에서 들었다는 말이었다. 몸을 훑어 내리며 읊조린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단다.
동료 교사는 교사들끼리 모여 쉴 때 슬며시 피해 사실을 꺼냈다. 모두가 숙연해졌고, 분노했다. 미친 거 아니야. 이를 필두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터졌다. 누군가는 그 아이가 유독 장난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자신에게도 그 아이가 ‘civa’를 읽어달라고 졸라서 [취바]라고 읽어 줬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누군가는 그 아이의 주도로 남자애들이 버스에서 야한 이야기를 떠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렇게 주제는 그 아이에서 고학년 남자아이들의 장난으로 넘어갔다. 동료 교사의 감정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조금 괴로워하던 동료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자상하고 좋은 선생님의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그 성폭력 사건은 교사들 사이에서 아이들 뒷담화 정도로 남았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곳은 가장 낮은 곳의, 가장 불편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나이 권력과 선생님의 위계로 인한 불평등을 염려해 서로의 별명을 불렀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대로 묻혔다. 그나마 가장 분노했던 나도, 열한 살짜리를 어떻게 벌할 것이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가해자는 어린아이였고, 잘못을 묻기도 어려운 나이였다. 교육으로 해결해야 한다 하더라도 누가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또한 문제였다.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나에게는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았다.
나이 권력 해체를 주장한답시고 별명을 만들어 부른 탓이었을까.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선생이던 나는 과연 권력을 지녔는가.
나는 왜 이곳에서도 여성인가.
교사는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여교사는 교사라기보다는 여성으로 자리하곤 한다. 교대에 재학 중인 ‘캔디’는 학생의 여성 교사 대상 성폭력에 대해 “교사-학생이 아니라 남성-여성이라는 위계에 따라서 생각을 했을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교사라는 지위도 소용없을 만큼 취약하다. 교직 이수 과정에 있는 ‘사슴’ 또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위도 뛰어넘는 이름이라며 자조했다.
사슴 : 이재용이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이 ‘삼성의 말 협회 지원이 한화보다 못하다’고 꾸짖은 적이 있대요. 이재용이 진술 때 회상하면서 말하는 게, 그게 되게 짜증이 났대요. 자기는 여자한테 이런 얘기를(꾸짖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대통령에서 여자로 바로 점프하는 저 사고가 그 아이들한테도 있을 것 같아요.
학생 인권을 위하여 교원 평가제를 도입했다지만 여성 교사들은 일찍이 평가 대상으로 자리했다. 문제는 그 평가의 기준이 교사로서의 능력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매력이었다는 점이다. 남중·남고 출신 학우 앨빈은 ‘여성 교사는 어떤 존재였냐’는 물음에 ‘아이돌’이었다고 답한다. 아이돌이라는 명명은 얼핏 칭찬처럼 들리나 이는 오히려 소비하기 알맞다는 뜻이다. 이는 여교사를 철저히 성적으로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모든 맥락을 거세한 채 외모만을 찬양하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은 여교사는 교사가 아니라는 현실의 또 하나의 단면이다.
앨빈: 수업을 잘하냐 못하냐가 아니고 항상 ‘얼마나 예쁘냐’를 가지고 평가했어요. 이쁘더라, 성형했을 것 같다, 코가 너무 높다, 저 정도면 괜찮지, 이런 식의 얘기들만 오갔지….
남중·남고 출신의 앨빈은 ‘남선생님에 대해서는 수업 방식에 대해 평가를 했던 반면 여성 선생님의 경우에는 외모만이 평가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여선생은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외모 평가의 대상으로만 소비된다는 것이다. 교사라는 위치는 평가에 쾌감을 더할 뿐 이를 막아내지는 못한다. 또한, 그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코 존중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성폭력은 강간 또는 언어나 행동을 통한 성희롱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피해자의 성적 불쾌감에 기반을 둔 성폭력의 규정에 의하면, 피해자가 성적 불쾌감을 느꼈다면 직접적 욕설이 아닌 성적인 발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폭력이 성립한다. 특히 학생들의 교사 대상 성폭력은 노골적인 성폭력뿐만 아니라 외모 평가부터 장난스러운 물음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적인 담화를 발화하고 여교사의 반응을 즐기는 식의 놀이 또한 잦다. 성 불평등한 사회 특성상 성적인 담화는 여성에게만 은닉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남성이 성적인 언어를 발화함으로써 여성이 당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남자애들의 흔한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교사-학생보다도 우선시되는 남성-여성의 권력 구도 아래 여성 교사는 쉽게 성폭력의 대상이 된다.
여성과 교사의 부조화
그린 : 얼마 전에 초등학교 교사가 쓴 칼럼을 봤는데, 한 남학생에게 여학생을 괴롭힌 이유를 물어보니까 “제가 이길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다는 거예요.
“제가 이길 것 같아서요.”
폭력은 권력의 문제다. 폭력은 평등한 관계에서는 벌어지지 않으며, 권력을 전복하거나 확고히 하려 할 때 일어난다. 즉, 권력 관계에서 상위에 있을 때 쉽게 폭력이 행해지며, 피해자가 자신을 구제하지 못할 때 그것은 폭력으로 성립된다. 하지만 그 권력 관계는 그리 가시적이지 않다. 교사-학생 관계라는 가시적인 위계 속에서도, 집단 내부의 특성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권력 관계는 변화한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름은 그 어디서든 소수자의 위치, 즉 권력의 하위를 쉽게 점할 수 있게 해준다. 교사라는 이름 앞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남중·남고 출신 학우 박쥐와 교직 이수 중인 사슴은 학교에서 젊은 여성 교사는 ‘만만한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제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교사라는 권위를 가져도, 여성이기 때문이다. 교장, 교감, 학부모에서부터 동료 교사, 마지막으로 학생까지, 여성은 그 어떤 권력 관계에서든 최하위에 놓인다. 그래서 젊은 여교사를 향한 공격은 쉽다. 폭력은 상대가 만만할 때 일어나고, 성폭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다. 가장 내밀한 부분을 침해하는 것으로, 가해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피해자로 하여금 성적 불쾌감을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가 폭력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가능한 행위인 것이다.
여성 교사가 처해있는 권력 위계는 학생인권부에 여성 교사가 없다는 현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거 학생부, 생활지도부로도 불렸던 학생인권부는 주로 생활지도나 징계 등을 담당한다. 고등학교 10년 차 교사 A는 학생부에는 여성 선생님들이 거의 없다며, 생활지도나 징계 등의 업무는 현실적으로 여성 선생님들이 다루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교사 A : 현실적으로 학생부에는 여자 선생님들이 거의 없어요. 징계라든가 처벌 이런 관련된 부서기 때문에. 여자 선생님들이 배정받으셔도 주로 교복 물려주기 담당이라든가, 환경 미화 이런 쪽 업무로 배정받으시면 모를까. 학생들 생활지도 관련해서 여자 선생님들이 배정받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아요.
지도와 징계에는 권위가 요구된다. ‘가르쳐 이끈다’는 것과 ‘잘못을 제재하며 나무란다’는 것은 보다 많이 알거나 성숙한 상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에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은 그 권위와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여성’ ‘교사’라는 이 부조화는 꼬마 원님만큼이나 우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성의 ‘교사 되기’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서 교사로 인정받을 것인지는 개별 교사의 과제로 남는다. 교직 이수 과정에 있는 사슴은 교육 봉사로 남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 ‘예쁨을 받을지 빡빡하게 굴지’ 고민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이끄는 방법으로 호감을 사서 교사를 따르게 할지, 엄격한 모습을 보여 통제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사슴: 남학생 앞에 여자 선생님으로서 설 때는 포지셔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예쁨을 받아서 제가 공부를 하자 말하면 말을 따르게 해야 하나, 아니면 뻣뻣하게(빡빡하게)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식으로 해야 하나.
사슴이 택하는 방법은 대부분 후자다. 그 ‘예쁨’이 존중의 형태로 나타날지 결코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앨빈은 아이돌로 인기를 누렸던 선생님의 수업도 아이들은 전혀 집중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희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성이 ‘교사’의 지위를 획득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사슴의 말에 따르면 빡빡하게 구는 것, 즉 여성으로서 기대되는 것들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폭력에 대한 교사의 대처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모두 여성으로서 기대되는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교사 A는 처음 성폭력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당황한 것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교사 A: 애들이 그렇게 저한테 간을 보러 들어왔을 때,(“선생님 신혼여행 가서 뭐했어요?” 같은 성희롱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저 같은 경우는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몰라? 네이버 물어봐’ 이런 식으로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직도 모르니?’ 이런 식으로.
교사 A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함으로써 ‘그런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국물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기억한다. 즉, 여교사가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며, 화를 낼 것이라는 기대와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다. 한편 앨빈의 중학교 수학 선생님은 성폭력을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녀는 치마를 입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의 대처는 사건 이후 치마를 입지 않는 것이었다. 즉, 여성의 성적 표상을 제거함으로써 성폭력의 대상이 될 여지를 없앤 것이다.
앨빈: 선생님이 학생들 가까이 가서 개인 지도를 가끔 하시잖아요. 치마를 입고 온 날에는 고개를 숙이시게 되는데 그럼 애들이 (고개를) 밑으로 해서 치마 속을 보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선생님이 인지하신 후부터는 스커트를 안 입으셨어요.
남중·남고 출신의 학우 박쥐는 ‘희화화되고 성적 대상화 되는 건 젊은 여성 선생님, 젊은 여자 선생이니까 좀 깔보는 게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나이가 좀 있는 여성 선생님들한테는 남성 선생님에게 대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즉, ‘여성성’을 갖는 것은 젊은 여성만이다. 권력 관계 하위에 위치하는 여성은 얕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 듦이나 결혼을 통해 젊음을 제거할 경우 ‘여교사’의 정체성을 제거할 수 있다. 현직교사 A는 ‘스물네 살 때 처음 학교 갔을 때부터, 애들한테 나이가 삼십 대 후반이라고 그랬다’고 고백한다. 젊은 여성이 만만하게 보이는 현실을 알기에 젊음을 제거함으로써 여성성을 지운 것이다. 놀랍게도 여성성의 박탈은 ‘진짜 교사’를 만든다.
지워지는 감정 지워지는 피해
여교사로 산다는 것은 일상적인 성폭력에 필연적으로 노출되는 일이다. 장난스러운 질문과 뒤통수 외모 평가는 일상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성폭력에 있어서 교사들에게는 능숙한 대처가 요구되고, 이것이 교사능력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10년 차 교사 A는 자신의 대처를 예로 들며, 내적으로는 감정적으로 휘둘릴지라도 티 내지 않고 대처하는 게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교사 A : 종례하고 있는데, 덩치 큰 남학생이었어요. 성큼성큼 오더니 교탁에서 제 손을 덥석 잡는 거예요. 속으론 진짜 엄청 놀랐죠.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 다 들었는데 걔를 살짝 쳐다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아, 뭐 하자는 거야’ 이렇게 반응을 했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제가 다른 학생들한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오늘 몇조 청소하고 뭐 어떻게 하고 내일 지각하지 말고 와라, 하고 종례를 끝냈어요. 그때까지 걔는 그 자리에서 계속 제 손을 잡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너 이거 선생님 남자친구가 알면 가만 안 있는다’ 이런 식으로 (담담하고 능청스럽게) 반응을 했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그 학생이 “선생님, 죄송했어요.” 그러더라고요.
이 사례는 학교 청춘 드라마 스토리와 닮아있다. 비뚤어진 학생이 선생님을 위협할 때, 선생님은 의연한 대처로 아이의 성찰과 사과를 이끌어낸다. 비뚤어진 학생이 교사의 탁월한 대처로 변화하는 클리셰는 익숙하다. 하지만 이 미담에서 교사는 철저히 희생된다. 학생에게서 물리적, 감정적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휘둘리지 않고 잘 대처하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폭력 상황이 교사가 감당해야 할 문제가 되면 아무리 탁월하게 대처한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개별 교사의 감정은 지워진다. 교육적 목적 아래 개별 교사의 감정과 상황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불안감, 위협, 불쾌감은 교사가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탁월한 대처를 보여줬던 교사 A도 감정적인 동요는 있지만 ‘나는 프로니까, 나는 프로니까’하고 억누르고 대처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교사 A : 저도 사실 항상 매 교시 수업 들어갈 때마다 진짜 속으로 ‘아 오늘도 무사히’ 기도하고 들어가요, 진짜로. 백조가 물 밑에서 정말 살려고 버둥버둥하는 것처럼, 아 제발 오늘만 무사히, 이 시간만 무사히. 저도 진짜 그렇게 마음먹고 들어가요.
잘 대처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면 이는 거꾸로 압박으로도 작용한다. 교사가 피해당사자일지라도 ‘잘 대처해야한다’는 부담은 교사의 자기행동 검열과 수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앨빈의 수학 선생님의 사례는 성폭력이 교사의 자기 검열과 자기 수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잘 보여준다. 본인은 관망하고 있었다는 앨빈은 교사의 당시 모습에 대하여 ‘선생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걸 살짝 보았다’며 ‘겉으로 티는 많이 안 내셨지만,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뿐, 그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이후 선생님의 옷차림이 바뀌는 것으로 그 사건은 끝났다.
사슴은 피해자-교사를 외면하는 교육 현실에서 ‘성희롱으로 치는 순간 선생님 자신도 정말 힘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학생들의 성폭력은 ‘애들이 흔히 하는 장난’의 형태로 규정되고, 따라서 이는 교사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성폭력 상황을 교사의 책임으로 돌리는 꼴이다. 따라서 개별 교사들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성폭력에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며 성폭력 피해를 부정하게 된다. 피해의 인정은 교사의 무능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교사-피해자 외면하는 학교
이제까지 교육계는 교사-피해자의 성립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발현 맥락이 상당히 오랫동안 비가시화되었던 성차별이었기에 더욱 알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차별이 학교 내에서 교사-학생 위계를 뛰어넘어 나타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사실상 고질적인 문제였음에도 인식하지 못했다. 사슴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교사가 교실의 절대 권위자일 것이라고 상정하는 현실과 다른 관점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교사 대상 교육 또한 교사가 가해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피해자가 되는 경우를 상상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 교대에 재학 중인 캔디는 우리 학교에 교사 대상 성폭력 예방이나 성교육, 대처에 대한 교육과정이 없다고 답했다. 교직 이수 과정에 있는 사슴과 현직 교사 A 또한 교육대 커리큘럼이나 신규 교사 발령 연수에서 학생들 간 폭력/성폭력에 대해서 다룰 뿐 교사가 피해자가 되었을 경우는 다뤄진 적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교원 성폭력 예방 연수자료(2015)에서는 아예 교사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교사-교사 간의 성폭력에만 가정한다. 학생의 교사 대상 성폭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성폭력 교원은 교단에서 원천 배제된다’ 정도의 협박 어린 말뿐이다. 물론 성폭력 예방 교육은 필요하고, 그 예방의 주체로 피해자가 아닌 잠재적 가해자를 두는 것은 옳다. 그러나 교원 성폭력의 가해자를 오직 교원으로만 상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학생-교사 성폭력에 대한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부가 발간한 ‘2017년 교육활동 보호 매뉴얼’에서는 그나마 학생의 교사대상 성폭력 가능성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몇 년 새 학생의 여교사 대상 성폭력이 급격히 공론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학생 집단자위 사건’과 같이 실시간검색어를 오르내린 사건들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포털에 ‘여교사’를 검색하면 매일같이 새로운 성폭력 사건이 업로드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당 매뉴얼 역시 교사 대상 성폭력을 ‘교권침해’의 일환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여교사 대상 성폭력은 교권침해의 맥락보다 여성혐오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 여교사 성폭력은 교권 추락 붕괴에 따른 게 아니라 ‘원래 있었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사 A와 그린은 최근 들어 유독 많이 공론화되는 여교사 대상 성폭력 이슈에 대해서 ‘요즘 들어 처음으로 생긴 일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더불어 여교사 성폭력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라 ‘옛날부터 있었지만 이제야 문제시되고,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과거에는 남자애들은 원래 그래, 하고 넘겨졌던 일들이 그나마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평등과 성폭력은 이미 학교에 오랫동안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장난의 탈을 쓴 폭력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들 말한다. 특히 무한 경쟁 사회에 덧대어 학교 또한 경쟁만이 남았다는 이야기는 익숙하다. 이는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감히 아이들에게 왜 여교사를 만만하게 보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그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여성을 만만하게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초·중학생을 가르쳤던 그린은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순수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정관념을 대놓고 드러낸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언어, 행동, 옷차림까지 굉장히 정형화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사실상 아이들은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행하는 것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청소년 스마트폰 보급률이 90%가 넘는 시대에서 세상의 성차별을 습득하기란 어렵지 않다. 인터넷 방송을 통해 인기 BJ가 성폭력을 생중계하고, 그것이 혐오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여성혐오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교사가 성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교사 A는 학생의 여교사 대상 성폭력에 대해 아이들이 성적인 의도를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을 골리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교사 A : 그냥 애들은 어떤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했다기보다, 나보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고, 여자 선생님인데, 저 선생님을 골려 먹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장난은 누구에게 가능한가. 놀리고, 골려 먹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만 가능한가. 학생부 선생님을 놀리거나 골려 먹지 않는다. 놀림과 골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만만한 존재인 여성 교사다. ‘장난’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많은 폭력을 정당화하는가. 폭력은 장난의 이름으로 당연한 일상이 되어서 자리한다. 여성 교사 성폭력 문제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의 성폭력은 친구가 아니라 여성 교사를 향할 때 오히려 면죄부를 얻었다. 남성과 여성, 그러나 학생과 교사라는 미묘한 권력의 줄타기 사이 폭력이 아닌 ‘장난’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난은 권력을 등에 업을 때 폭력이 된다.
교사 A : 어떻게 설명해도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게 뭐 정말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라고 저는 생각해요.
아이들의 폭력에 ‘나쁜 의도’란 없다. 폭력에 나쁜 의도가 없다는 말은 웃기지만,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나쁜 의도 없이 폭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의도치 않은 폭력이란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고정관념,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생각의 표출이 폭력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 폭력이 자연스러운 것. 쉽게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회가 폭력을 용납하는, 아니 그 사회가 폭력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것을 방증한다. 불평등을 넘어서 폭력이 일상적인 세계다. 불평등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가장 약한 곳에 생채기를 낸다. 그래, 사실 우리의 경험만 되짚어 봐도 학교에서 ‘나쁜 의도 없는 장난’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선생님 치마 밑 거울, 벽면 빼곡히 찬 성적인 욕설 낙서들.
젊은 여선생님만을 향하던 “첫 키스 얘기해주세요-”.
선생님 예뻐서 수업 들어요, 와아 웃었던 분명 ‘농담’이었던 말들.
영화를 보여준다는 선생님에게 굳이 굳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첫 장면만 봐요, 졸랐던 아이들.
화살이 나를 향하지 않았기에 장난으로만 보였던 그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교사들의 경험 속에서는 폭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여성의 시선에서는 폭력인 그것들은 모두 ‘나쁜 의도는 아닌’ 장난이었다. 학교에서의 성폭력은 결코 요즈음의 뉴스에서만 터지는 것이 아닌, 너무도 오랜 시간 자연스러운 것으로 존재했던 일상이었다. 다만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남선생님들이 ‘장난’을 비껴가는 이유가 무섭고 체벌을 해서가 아니라 남성이기 때문이었음을. 그 ‘놀린다, 골린다’라는 표현은 사실 선생을 향한 것이 아닌 여성만을 향한 것이었음을. 장난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실상 폭력이었음을. 학교에서 성폭력은 충분히 일상적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낌 (dglow2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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