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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편집위원회
사회

<114호> 당신은 '소녀'를 '지킬' 수 없다 - 위안부: 민족, 가부장, 그리고 보급품으로서의 여성 ②_편집위원 서영

by yonseiji 2025. 12. 17.

2. ‘위안부’와 여성인권운동

패러다임 전환에 박차를 가하다

‘위안부’를 둘러싼 사건 그 자체에 대한 규명과 처벌도 중요하지만, 그 운동 과정의 전반이 세계 여성사와 여성운동에 중요한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 또한 의의가 크다.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알려진 계기는 1991년 8월 14일 고(姑) 김학순 씨의 피해 증언 기자회견이었다. 그의 증언 이후 수많은 피해자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김학순 씨의 증언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 10년간 이어졌던 여성 간 연대와 움직임 덕이었다.   

먼저 1970년대 이후 제2차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역사와 여성의 관점으로 본 새로운 현실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료가 있더라도 그것은 남성들이 저술한 것이며, 그것도 역사의 검열을 거친 후 남겨진 한정된 것들에 불과했다” [각주:1]
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즉, 당시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을 ‘수동적 존재’에서 역사를 만들어내는 ‘주체적 의사 결정자’로 패러다임 전환을 꾀했던 것” [각주:2] 이 하나의 배경이 된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발굴한 이는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로, 왜 광복 이후 한국 땅에 남자들은 돌아오는데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동료들과 함께 ‘위안부’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움직임과 함께 진보적 여성단체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여성단체들의 연구 활동 지원에 힘입어, 연구팀은 1988년 국제 세미나에서 일본 남성들의 한국 ‘기생 관광’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최초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공식적으로 폭로한다. 국가가 주도한 성노예제로 고통받았던 여성의 역사가, 또다시 국가가 알선하는 기생관광의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그 자리에 함께했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를 계기로 1990년 서른일곱 개 단체가 모여 정대협이 결성되고 피해 당사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 제보자로 김학순 씨가 등장했던 것이다. [각주:3]

그렇게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는 있었으나 누구도 범죄라 생각지 않았던 문제가 ‘성범죄’라 불리며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패전 후 다른 여러 전쟁범죄와 달리 피해를 ‘문제화’하는 데만 반세기가 걸렸고, 이는 단지 묻혀있던 역사를 발굴하는 작업이 아닌. ‘남성 중심의 전쟁기록이 도전받고 뒤집힘’ 을 의미했다. 여성이 직접 나서 성폭력 언설에 대한 금기에 맞서고, 이제껏 알려졌던 것과 다른 새로운 현실을 구성한 것이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27년간 직접 1,300회 이상의 수요집회에 참여하였으며, 해외 곳곳에서 직접 피해를 증언하며 전 지구적 젠더 문제로 끌어내었다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여성 인권 운동의 모델로 자리했다. ‘위안부’뿐 아니라 전세계의 수많은 전시 성폭력이 시공간 차이를 넘는 유사성을 보였기에, ‘위안부’를 연결고리 삼아 국제법상에서 젠더범죄에 대한 체계적인 법 논리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와 피해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온 세계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힘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늘 신중하면서도 강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1991 년  8 월  14 일 정대협이 마련한 기자회견장에서 최초로 공개 증언하는 김학순 씨
베를린의 여성단체  ‘ 테레데팜 ’  사무실에서 난민 여성들과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나비기금을 전달하는 길원옥 씨 .  그는 지난  20 여년 간 분쟁지역에서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인권 회복에 앞장서 왔다 .
‘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 ’  이 수여한  ‘ 여성 인권상 ’  상금  1 억 원을 전액 기부한 송신도 씨 .  이 기금은 일본에서  ‘ 위안부 ’  문제 개선을 위한 교육활동에 쓰일 예정이다 .

 

한국군 ‘제 5종 보급품’의 끔찍한 실체
            
위안소는 ‘억제 불가능한 군인들의 성욕 배출을 위해’ 세워졌다. 일본군 문서에 드러난 위안소 설립 목적 네 가지 [각주:4]
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군인에 의한 점령지여성 강간방지(1939년 군의관 하야오 도라오 중위의 논문에는 “군당국은 군인의 성욕은 억제 불가능이라 하여 중국부인을 강간하지 않도록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② 성병 만연 방지 ③ 군인들에게 위안 제공 ④ 군인기밀유지와 간첩행위방지.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해사변위안소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전부터 해군을 위한 위안소는 꾸준히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안소는 1937년 중일전쟁 전면화 과정에서 급증했고, 41년 아시아태평양 각지로 퍼져나갔다. 위안소 설립 이후로 식민지 여성 납치, 인신매매 사건이 급증했다.

위안부’범죄의 중대성은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이 전쟁을 빌미로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 있다. 조선 여성뿐 아니라 일본이 점령지로 삼았던 모든 나라의 여성이 ‘위안부’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군의 숫자에 비례하여 생각했을 때, 그 수는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안소의 위치는 중국, 태국, 몽골,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전역 및 태평양 군도의 일본군이 머물렀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었다.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일은 한반도에서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중에서도, 6.25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를 모방한 ‘한국군 위안부’가 설립되고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02년 김귀옥 박사(현 한성대학교 교수)가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한국군이 직접 설립하고 운영했던 ‘특수위안대’에 대한 사실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다. 이는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후방전사』를 근거로 한다. [각주:5]  『후방전사』 ‘제3장 1절 3항 특수위안활동 사항’에는 “실질적으로 사기양양은 물론 전쟁 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중략)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해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앞서 일본군이 내세웠던 ‘절제할 수 없는 성욕’과 다를 것이 없다. 당시 고정식 위안소와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을 이용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운영하였으며 서울, 강릉, 춘천 원주 속초 등지 총 7개소에 총 89명의 여성이 소속되어 있었다. 1인당 하루 평균 6회 이상의 ‘위안’을 제공해야 했으며, ‘출동 위안’의 경우 하루에 20~30회씩 강요당하기도 했다. 군인들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티켓을 배분받아 위안소를 사용했다. 특수위안대는 ‘제5종 보급품’이라는 별칭으로 기록되어있다(군대에서 사용하는 보급품은 1~4보급품). “일본군 위안부가 ‘천황의 하사품’이나 ‘군수품’으로 취급받은 점과 일맥상통” [각주:6] 한다. 어느 날 사령부의 ‘보급품 수령지시’가 있어 갔더니 ‘위안부’ 여성이 배정되어 있었고, 군인들이 줄을 서서 분대천막을 이용해 그 ‘보급품’을 이용했다는 당시 군인의 증언들도 여럿이다.

“사병들은 안을 기웃거리며 안에다 대고 ‘빨리 나와! 빨리 나와!’ 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 수 있었다. 천막에 들어가서 여자에게 표를 주고 10여 분 간 즐기고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그 순간 나는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각주:7]

『후방전사』  150 쪽에 실린  ‘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 ’ 를 김귀옥 교수가 한글로 변환한 내용 . ‘ 위안 ’ 을 받은 군인이 연간  20 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

 

“(1950년대) 군대에 다녀온 한국 군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매독에 걸려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각주:8] 흔히 위안부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한국군이 파병 당시 베트남에서 강간했던 현지 여성들에 대해서는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미약하게나마 사죄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자국민이 자국민에 대해 ‘저지른’ 한국군 특수위안대에 대해서는 논문이 발표된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국내에서는 어떠한 파장이나 움직임도 없다.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당시 언론들은 침묵했고, 국방부 소속 자료실에 비치되었던 자료 열람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공창’이었으니 괜찮다는 여론마저 있었다. 일본 측이 ‘위안부’를 매춘부에 빗대면 불같이 화를 내는 태도와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김귀옥 교수는 ‘당시 국방부에서 한국군 위안부 관련한 연구 활동을 자제시키라는 연락이 왔으며, 군사편찬연구서에서 『후방전사』가 사라졌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불편해했고 직접적 제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일지 않자 김귀옥 교수는 몇 차례 논문을 다듬어 재발표한다. 그러나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공식적 차원의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뿐인가. 60년대 초반부터 한국 정부는 직접 나서서 미군 기지촌 ‘양공주’를 알선했다. 국가는 막대한 외화벌이 수단인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안보와 교양 강좌를 개설하고, 예산의 상당 부분을 ‘몽키하우스’라 불리는 성병 진료소에 쏟았다. “냉전 질서에서 남한은 양공주들이 있어야만 안보를 유지할 수 있다. 기지촌은 남한과 미국이 맺은 계약관계에 따라 존재하며, 국가가 관리하는 산업이었다. 이러한 여성 거래를 통해 남성 주체들은 자신들의 연대를 강화한다” [각주:9] 수많은 한국 전후 소설에서 양공주 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 안에 당시의 멸시와 조롱, 열등감의 시선이 여실히 드러난다. 양공주는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가족공동체에서 제외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앞서 언급된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기생 관광 또한 마찬가지다. 경제개발 제일주의에 빠져 특정 지역과 특수관광 호텔에서 외국인, 특히 일본 남성 여행자를 상대로 성을 매매하는 여성을 양산해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삼았다. 일본의 관광업체들이 앞장서 ‘한국기생파티관광단’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홍보할 정도였다. 이는 한일의 여성들이 반대하여 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자취를 감췄다.

한반도 땅 위에서 자국의 여성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부터 원나라, 청나라, 명나라에 각각 바쳐진 ‘공녀(貢女)’. 그들이 ‘환향녀(還鄕女)’가 되어 돌아왔을 땐, ‘절개를 잃은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다’며 낸 이혼소송이 조정에 빗발쳤다. ‘아녀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면서 끌려갔던 여인들을 다시 한번 집에서 쫓아냈고, 아침이 되면 산중과 지천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냥년’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2017년.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창의적일 정도의 다양한 성매매와 동남아 섹스관광이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버젓이 자행된다. 반세기 전의 ‘위안부’나 현재의 성매매나 그 구조는 마찬가지다. “군대 가기 전에 총각 딱지 떼야지” 부류의 농담도, 접대와 로비라는 이름의 단체 성매매도, TV 토크쇼에서 룸살롱 일화를 자랑스레 풀어 놓는 남자 연예인들도, 일부 남초 사이트에서 이따금 보이는 ‘전쟁 나면 김치년들 싹 다 강간’하겠다는 부류의 저급한 댓글도 모두 통용되는 나라에서 유독 ‘위안부’라는 단어에만 가슴을 부여잡고 마음 아픈 표정을 짓는 것은 퍽이나 가식적이다.

영화 <귀향>에 등장한 위안소의 생김새에서 현대의 ‘오피’와 ‘빡촌’을 떠올린 이들이 있었던 이유는, 칸칸이 나눠진 방 앞에 남성들이 섹스하려 줄을 선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한국 영화에서 너무도 흔히 비친 장면이었다. 여성을 눕혀놓고 남성들이 차례로 강간하는 장면이 나오면 ‘성폭행 영화’라는 이름이 붙고, 짐짓 점잖은 체하는 반응이 이어진다. 하지만 영화 속 남성이 ‘돈을 지불하면’ 합법적 장면으로 변모한다. 영화 속 소위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돈을 주고 성을 구매하는 일이 그저 일상처럼 그려진다. 음침한 방안에서 양쪽 겨드랑이에 헐벗은 여성들을 끼고 희롱하는 일에 뻔뻔스럽게도 ‘접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노출한 여성의 몸을 서비스 컷으로 등장시켜 눈요기 삼는다. 천만 영화 속 재벌과 고위간부들의 고급 룸살롱이나, B급 영화 속 노래방 도우미나 매한가지로 성매매나 창녀 캐릭터를 감초처럼 써먹는다. 물론 눈살을 찌푸리라고 만든 성폭행 장면이나, 서비스 컷으로 들어가는 성매매 장면이나 액기스 편집본 [각주:10]
이 돌아다닌다는 점은 똑같다.

현실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돈을 내면 강간도 강간 아닌 것이 된다. 여전히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같은 광고가 나붙고, 아직도 ‘창녀촌을 합법화시켜야 남자 성욕이 배출되어 일반여성에 대한 강간이 줄어든다’ 같은 기가 막힌 헛소리들이 나돈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룸살롱이다’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스운 모순이다. 일본 정부만 사과하고 반성해야 하는가? 책임의 주체는 누구이며, ‘누가’ ‘무엇을’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다시금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위안부’ 이후의 삶 - 광복은 언제 오는가?
 
우에노 지즈코는 ‘위안부’를 둘러싼 이중의 범죄를 지적한다. [각주:11] 하나가 전시 일본군의 강간 그 자체라면, 다른 하나는 전쟁 이후로도 반세기 동안이나 그것을 피해라 인지하지 못하도록 했던, 그리고 ‘나 자신의 치욕’으로 안고 살게 했던 가부장 사회의 일상적 폭력이다. ‘위안부’ 피해 못지않게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그 이후의 삶이었다. 많은 이들이 순결을 잃었다는 창피를 견딜 수 없었고, 피해사실을 알게 되면 가족들도 반겨주지 않았으므로 오로지 자신의 문제로만 여기고 마음속에 눌러 담아야 했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들어줄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오히려 손가락질이나 받았겠죠.” [각주:12]  ‘운 좋게도’ 사회에 편입된 이들은 남편에 의한 폭력에 시달렸다. [각주:13]  어떤 이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고, 자궁이 굳어 임신을 할 수 없어 남편에게 ‘새 여자’를 직접 만들어주어야 했던 이도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7살 연상의 노인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던 경우도, ‘남자가 지긋지긋하여’ 남편을 보며 정신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던 상황도, 트라우마로 인해 잠자리를 거부했으나 남편이 행패를 부려 억지로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는 증언도 있다. 가부장 사회가 만든 치욕과 정조에 대한 억압은 광복 이후 한국 땅에서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두 번째 폭력이었다. 돌아온 곳 역시 못지않은 지옥이었다. 한국사회는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가족의 품, 아름다운 귀향은 그림책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위안부’가 일본군과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국민의 피해일 뿐 아니라 ‘남성에 의해 자행된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이야말로 ‘잊지 말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늘 ‘사죄할 줄 모르는 나쁜 일본’의 얄팍한 국민성을 욕하는 것으로 귀결되곤 한다. 대규모 강간을 국가적으로 조직한 일본에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나, 그것이 일본이 단지 ‘나쁜 놈’이라 발생한 아주 희귀한 형태의 폭력은 아니었고, 일본군과 한국군 문서에 쌍둥이처럼 남은 남성들의 ‘절제할 수 없는 성욕’ 때문도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가해자는 단순 일본이 아닌 가부장 사회를 포함하며, ‘위안부’ 문제는 한일전 축구게임을 보듯 하는 감정으로 소녀상을 세우냐 마냐를 논하는 기싸움의 차원이 아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던 사건도, 자국 남성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응징해야 할 사건도 아니다. 과하게 둘러진 한일관계의 프레임을 걷어낼 때에서야, 양국의 남성 중심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이등 시민으로서의 여성’, 더 나아가 ‘보급품으로서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적대심을 앞에 내세울 때 실질적 가해자인 ‘남성’은 가해 선상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3. ‘씻을 수 없는 죄’로 경로 재탐색하기
 
                   “정의라는 개념은 억압과 지배 관계로서의 부정의를 사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각주:14]

“정의가 이긴다!”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라는 감각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렇게나 내걸기엔 무책임한 말이다. ‘위안부’ 운동은 초기부터 남성 중심적 민족주의에 대한 이중성을 폭로하는 저항 운동이자, 가부장제 국가 간의 적대관계에서 멋대로 위치 지어진 ‘여성’에 대한 끊임없는 되물음이었다. 그렇기에 또다시 가부장제가 좋아하는, 남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위치선정 – ‘소녀’ 이미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굿즈들과 정책 슬로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녀상 소비에 담긴 온정의 시선은 ‘이등 시민으로서의 여성’을 깨부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여성 언어에 대한 속박이자 담론형성을 억제하는 장애물로써 작용할 위험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여성사의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 전복적 상상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의한 패러다임 변화는 여성들의 경험을 재정의할 수 있는 범주 상의 자원”이며 “자신이 희생자임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자신의 약함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각주:15] 오히려 그것은 강인함이다. 성폭력의 규명은 피해자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아니라 가해자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짚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왜 여성운동에 있어서까지 모두가 좋아할 예쁘고 부드러운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걸러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영영 채워질 일 없는 반쪽짜리 정의만 남을 것이다. 정의란, 조금의 바람에도 힘없이 일렁이는 수면 위의 물이 아닌, 제아무리 거센 파도가 쳐도 평온하게 제자리에 쌓여 있는 심해의 물과 같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맥락 없는 ‘잊지 않겠습니다’ 와 ‘미안합니다’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소녀상을 보며 각자의 책임을 재확인하고, 그것이 자각과 실천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나 사회운동이 소비와 유행의 모습으로 번져가는 요즘의 상황에서는 이런 당연한 사실조차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특정 상대를 향한 단편적 분노 표출이 아니라, 모두가 가부장제의 가해자 혹은 동조자로서 책임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개인에게는 부정의를 바로잡아야 할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위안부’가 과거의 역사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며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의 분쟁과 내전 지역에서 수많은 여성은 꾸준히 강간, 성노예, 임신, 에이즈 감염, 매춘에 시달려야 했다. 종전 후에도 점령군의 현지여성 강간은 계속되고, 포로수용소에서 성고문이 반복되고, 현지의 인권운동가까지 군부와 경찰에게 성폭행당하는 일이 허다했다. 현대의 성폭력은 과거보다 더 조직적이고 전략적이다. 지금도 콩고 동부에서는 매시간 48명, 즉 매일 1100명의 여성이 가족과 주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강간당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국경을 넘는 연대가 가능해진다.
 
‘2015 합의’는 여전히 한국이 식민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후퇴의 징표였다. 결국 피해자 없는 피해자 합의만 남았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격이 불분명한 10억 엔의 객체로 또다시 멋대로 위치 지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추진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곧 12월이다. 명백한 후퇴를 눈앞에 두고 헛물만 켜는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서영(oksusu.lover@gmail.com)

 



  1.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우에노 지즈코, 이선이 역, 현실문화, 2016, p. 27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 우에노 지즈코, 2016, p. 40. [본문으로]
  3. 해당 문단은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일본군위안부운동의 역사와 ‘2015 한일 합의의 문제점」, 2015 ‘위안부합의 이대로는 안 된다』, 이나영, 경인문화사, 2016, pp. 110–116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 [본문으로]
  4. 해당 내용은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의 전시물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5. 이어지는한국군 위안부관련 내용은 모두 「한국전쟁과 한국위안부 문제를 돌아본다」, 『구술사연구』 제2 1, 김귀옥, 2011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6. 한국군도위안부운용했다”, 오마이뉴스, 2002. 02. 22. [본문으로]
  7. 『격량의 세월과 인샬라』, 한인수, 교음사, 2003, p. 96. [본문으로]
  8. 프랑스 파리 7대학에서 열린 김귀옥 교수의 세미나 중 ― “한국군 특수위안대: 한국전쟁 제5종 보급품은여자였다”, 딴지일보, 2016. 07. 27. [본문으로]
  9. 「냉전 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 『역사문제연구』 35, 허윤, 2016, p. 89. [본문으로]
  10. 액기스 편집이란 긴 영상에서 특정 부분만을 짧게 잘라 모으는 행위로, 주로 에로 영화에서 섹스 장면만 빼낸 편집본을 일컫는 은어였다. 그러나 실제 성폭력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 <귀향>, <한공주>, <도가니>에서마저도 강간 장면을 편집하여액기스라는 이름으로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유포된 일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본문으로]
  11. 우에노 지즈코, 2016, pp. 98–99. [본문으로]
  12. 피해자 강덕경 씨 인터뷰 중 ― “정신대 사죄받아야 진짜 8·15”, 한겨레, 1994. 08. 16. [본문으로]
  13. 해당 문단의 내용 또한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의 전시물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본문으로]
  14.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영, 2013, p. 166. [본문으로]
  15. 우에노 지즈코, 2016, p. 21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