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9살 자녀와 제주도의 한 식당을 찾은 A씨는 입장을 거부당했다. ‘아이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A씨는 이것이 아동에 대한 부당한 차별임을 주장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진정을 받아들여 “아동을 배제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고 평했다. 특정 집단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면 안전 등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지만 해당 식당은 아이에게 위험한 환경이 아니라고 인권위는 설명했다. 더 중요한 지적은, 문제 시 이용이 제한된다고 미리 알리는 등의 다른 노력 없이 아이라는 계층을 처음부터 차단한 것이 차별이라는 점이다.

아이의 출입을 차단하는 ‘노키즈존(No-kids zone)’이 논란거리로 떠오른 지는 1년이 넘었다. 공공장소의 엄마들을 ‘맘충’이라는 이름으로 검열하던 것이 이제는 아이들에게까지 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노키즈존을 내거는 곳은 주로 식당이나 카페 등이다. 어린아이들이 산만하거나 뛰어다녀 소음과 불편을 야기한다는 문제제기가 시작이었다. ‘어떤 엄마는 아이의 소변을 컵에 받더라’, ‘어떤 엄마는 밥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아이 기저귀 갈더라’ 등 아이와 관련된 ‘맘충 썰’이 퍼지며 아이와 엄마는 ‘민폐’의 이미지를 갖는 계층으로 자리매김했다. 안전사고 등 위험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에 점차 아이들을 들이지 않는 ‘노키즈존’ 도입이 늘어나는 추세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노키즈존을 반기는 분위기다. “시끄러운 애들을 내 눈앞에서 치울 수 있어서 좋다”는 식의 반응이 많다. 물론 누구의 시각인지 선명하게 보인다. 자신의 권리를 말할 능력도 힘도 부족한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논의에서 한 번도 주체가 된 적 없다. 어린아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민폐’, ‘꼴불견’, ‘짜증’ 등 부정적인 속성과 긴밀하게 엮이는 동안 한 번의 항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키즈존은 인권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많아지고 있다. 인권위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권고만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노키즈존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우세하다. 내가 있는 공간에 어린아이는 들이기 싫다는 마음이 번지는 것, 어떤 의미로 봐야 할까.
기울어진 운동장 속 노키즈존
특정 계층을 공공장소에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공간의 출입을 계층에 따라 나눈다는 발상은 과거 미국 등에서 실시되었던 인종 분리 정책을 연상시킨다. 인종 분리 정책(racial segregation)은 인종, 민족별로 생활공간과 공공시설 사용 공간 등을 강제로 분리시키는 정책이다. 1896년, 미국에서는 분리 시설의 수준이 평등하기만 하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을 분리해도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평등’에 기초하는 분리 시설을 눈감는 판결에 불과했다. 인종에 따라 공간을 분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흑인과 같은 공간에 있기를 거부하는 다수자 백인의 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54년, 마침내 대법원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분리 시설은 원천적으로 평등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시했고, '평등한 분리 시설'의 원칙을 공립학교에서 폐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브라운 판결). 이를 기점으로 인종 분리 정책은 사회 곳곳에서 점점 효력을 잃어 갔고, 결국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백 분리정책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당시에도 ‘분리하는 것이 곧 불평등은 아니’라는 항변이 존재했으며, 심지어 사회적으로는 우세했다. 이른바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인인권운동의 역사적 이정표로 꼽히는 브라운 판결에서 대법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물질적 시설과 비물질적 요소가 평등할지라도 인종만을 근거로 어린이를 분리하는 것은 소수집단의 어린이에게 균등한 기회를 박탈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 (흑백 분리 교육은) 흑인어린이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치며 열등감은 어린이의 학습동기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지위에 영향을 준다.” 1
노키즈존에 대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논평도 이 판결과 닮아 있다. 지난 2013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노키즈존 문제에 관해, 아이가 출입 제한 조치로 '문제아'로 인식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더불어 아이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아이가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악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결국 혐오대상이 되어 공공장소에서 배제되는 것은 비단 그 공간에서 쫓겨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며, 소수자의 자아는 혐오의 시선 앞에 위축된다. ‘평등한 물질적 시설과 비물질적 요소’를 지닌 공간들을 나누어 향유하더라도 그렇다. 하물며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데 ‘아이만 안 되는’ 공공장소는 어떻겠는가.
이쯤에서 의문이 제기될 법하다. 혹자는 ‘소수자’인지의 여부가 왜 중요하냐, 공간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계층을 배제하는 ‘합리적 차별’은 계층 불문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노키즈존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주장이다.
노키즈존의 비난과 배제는 누구를 향하는가? 첫째로 시끄럽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아이’이다. 그리고 노키즈존을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한 가지 대상이 더 그림자처럼 따라나온다. 아이에 대해 통제를 안(못) 하는 존재이다. 부모여야 할 것 같지만, 아이에 대한 문책의 시선은 언제나 아빠를 지나쳐 ‘엄마’에게 꽂힌다 2 . “애가 저렇게 시끄러운데, 쟤 엄마는 어딜 간 거야?” (또는,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결국 아이와 엄마다. 정리하자면, 노키즈존이 얻는 호응에는 ‘시끄럽게 굴어 민폐를 끼치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통제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짜증과 성가심이 큰 몫을 한다.
아이와 엄마, 둘 다 사회적 권력이 약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아이는 발언권이 매우 미약한 계층이다. 노키즈존의 빗장이 보통 8~13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걸려 있음을 생각하면, 노키즈존의 일차적 배제 대상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능력도 힘도 갖지 못한 어린아이임을 알 수 있다. 이차적 배제 대상인 엄마는 다를 것 같으나, 엄마들의 목소리는 그리 자유롭지도 강하지도 않다. 언제든 엄마들을 혐오의 눈초리로 검열할 준비가 된 대중 앞에 엄마들은 ‘맘충’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기 위해 사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계층이다. ‘맘충’이라는 기표에는 ‘잘못된 행동’이 아닌 ‘특정 계층’에 대한 비난만 들어 있다. 그렇기에 ‘맘충’의 요건은 ‘엄마’라는 계층성만 충족한다면, 발화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든 경우에 대해 끝없이 넓어질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아이를 키우는 한국의 여성들은 언제 무엇을 하든 ‘맘충’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는 공포 아래에 살아간다.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특정한 계층을 의심의 시선으로 검열하므로, 모든 ‘엄마’들은 그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편견이 보통의 행동을 ‘맘충’이며 ‘무개념’으로 낙인찍기도 한다. 혐오가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 결과 “(크게 아파 응급실을 왔는데) 응급실에서 우는 애 달래라는 사람도 있더라”, “아이가 길에 토한 걸 안 치웠다고 맘충이라 욕하는데 술 먹고 길에 토하는 취객들을 부르는 말은 뭐가 있냐, 엄마는 아이가 토할 정도로 아프면 병원 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텐데”라는 엄마들의 푸념이 들려온다. ‘맘충’이 되지 않고자 자신 스스로를 검열해야 하는 것은 물론, 엄마들이 노키즈존을 반대할 때 ‘맘충들이 찔려서 저런다’는 비웃음을 살 것이 너무도 자명하다. 결국 엄마들의 발언권은 억눌리거나, 힘을 얻지 못하고 매도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공간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계층이 ‘다수자’이며 ‘강자’여도 쉽게 내쫓을 수 있을까?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2016년 경찰청의 갑질 횡포 특별단속 결과 통계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갑질 횡포 가해자는 남성이 89.6%, 여성이 10.4%였다. 연령별로는 40, 50대가 가장 많았으며 두 연령대를 합치면 57%에 달했다. 세대별·성별로 보면 40·50대 남성이 가장 많이 적발된 셈이다. 갑질 가해 10건 중 6건은 블랙컨슈머(악의적 소비자) 문제였다 3 .
그러나 갑질이며 블랙컨슈머 노릇을 하는 사람 중 남성이 대다수라는 이유로 ‘남성 출입금지’를 내거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노아재존’을 지정하자는 논의가 진지하게 촉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성폭력 가해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다’라는 사실 그대로를 말해도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냐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이들이 널렸다. 거슬리는 언급 한 마디도 틀어막고 검열할 수 있는 남성들을 ‘잠재적 갑질 가해자’, ‘잠재적 블랙컨슈머’ 취급할 뿐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원천 차단해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성들이 만약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하고, 고정불변의 정체성 때문에 처음부터 배제되어도 ‘차별이 아니’라고 느낄지도 의문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권력이다. 노키즈존은 ‘만만한 사람’, 항변할 힘이 없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배제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는 타겟으로 완벽하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의 저자인 사회학자 오찬호 역시 칼럼 지면을 통해 노키즈존을 비판했다. “담배 피우는 행동을 통제하는 노스모킹존이 있었지만 흡연이 유력시되는 사람들을 미리 공간에서 통제한 역사는 없었다. 요즘 ‘카공족’(카페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면서 갑론을박이 한창이지만 사람을 원천 차단하자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 기껏 해봐야 ‘스터디 금지’라고 적어 놓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기준을 자꾸 적용한다.” 4 노키즈존을 선언하고 나서는 카페와 식당들도 다른 계층은 사전 차단하지 않는다. 왜일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이들뿐이어서? 그렇지 않다. 타자화하고 딱지 붙이는 것, 그렇게 자라난 혐오를 바탕으로 아예 접근을 차단하는 것, 모두 권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할 때만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쉬운 배제, 어려운 공존
사실 출입을 금지하는 것 자체로 무조건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출입 제한이 타당한 경우도 있다. 키가 어느 수준이 되지 못하면 안전이 위험한 놀이기구나, 파손되기 쉬운 예술작품이 있는 곳 등에서 어린아이를 받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노키즈존을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 판단하면서도 “문제가 된 이탈리아 음식점의 경우 이용자에게 시설 이용상 특별한 능력이나 주의가 요구되는 곳도 아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설 이용상 특별한 능력과 주의가 요구된다면 합당한 이유에 따른 정당한 차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키즈존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노키즈존이 합당한가? 아이가 시끄럽고, 민폐를 끼칠 수 있으니 출입을 금지하겠다는 발상에 대해 국가인권위는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사업주인 피진정인이 일부 아동의 산만한 행동이나 보호자의 무례한 행동을 이유로 모든 아동 및 아동을 동반한 보호자의 식당 이용을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일부의 사례를 객관적·합리적 이유 없이 일반화한 것에 해당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모순적이다. 노키즈존을 주장하는 이들 다수의 단골 멘트는 ‘엄마들이 민폐 끼치는 애들을 제지하지 않아 피해를 보았다’는 것. 엄마들이 통제하지 않아 문제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엄마들은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 ‘통제하지 않았을 때’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출입을 금지’한다. 아이들을 통제 가능하다면 제대로 통제하는 부모도 있을 텐데, 어떻게 ‘아이 출입 원천 차단’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가? 정말 그렇다면 모든 아이가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모든 아이의 출입을 처음부터 차단하니 차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도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입을 거부하는데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이 주장은 모순적일 뿐 아니라 온당치 못하다. 아이를 온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릴수록 그렇다. 자기통제능력이 미약하고,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실수를 하거나 소음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타인이 자신에게 야기한 피해’에 얼마나 엄격한가. 지난해 12월, 계속되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분노한 이웃 주민이 써 붙인 쪽지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층간소음 피해를 호소하는 쪽지의 내용은 평범했지만 많은 이들이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라’는 대목에서 멈칫했다. ‘도를 지나쳤다’, ‘말이 너무 심했다’는 반발이 한 축, ‘층간소음으로 밤잠을 못 자면 미칠 것 같다’, ‘저 정도면 (피해에 비해) 착하게 말한 것’이라는 옹호가 한 축이었다. 베스트 댓글로는 층간소음 문제를 겪었던 이의 경험담이 달렸는데 전개가 의외였다. “(…) 문이 열리는데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좀비 두 마리가 나오더군요. 엄마 좀비는 눈물콧물 범벅이고 아빠 좀비는 산발에 눈이 이만 리는 쑥 들어갔더라고요. (…) 콜릭(영아산통)이더라고요. 이건 대책이 없어요. 배앓이하는 아기도 힘들지만 부모들은 거의 죽어나가거든요. (…) 그냥 진짜 미칠 것처럼 운다 싶음 그래도 조금 이해라도 해주셨음 해서 글 남깁니다.”
여기에서 ‘그 정도는 참으라’는 말로 맞서고 싶지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수면부족과 같은 피해는 삶의 질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감내를 강요할 수 없다. 문제임을 인정하고 최대한 해결해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해결의 책임은 누구의 어깨에 지워지는가? 문제제기의 방향은 항상 사회적 해결 혹은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부모 개인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난다. 공존할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배제의 시도가 더 자주 나타난다. 문제는 이것을 개인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에도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것이다. 밤마다 울어댈 만큼 어린 아기는 ‘혼을 내면’ 더 심하게 울면 울었지 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부모도 우는 아기를 달래고 싶다. 갓난아기를 둔 엄마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 중 하나가 밤잠을 하루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것이다. 벽과 바닥 너머에서 지내는 이웃들이 시끄러워서 힘들 정도인데, 그 시끄러운 아이를 옆에서 밤새 돌보는 부모가 아이를 달래고 싶지 않을 리 있는가. 그런 이들에게 ‘아이의 입을 틀어막기라도 하라’는 말은, 현실적인 해결책도 아닐뿐더러, 얼마나 잔인한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층간소음 문제에 대한 청원은 100건이 넘는다. 그 중 대부분은 ‘층간소음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해 달라’는 것이며, 이러한 내용의 한 청원은 1천여 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피해를 호소하는 층간소음의 원인으로는 윗집에 ‘아이’가 산다는 내용이 자주 언급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울거나 뛰어대는 아이들이 층간소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자기통제능력이 낮은 아이들이 소음을 내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함을 감안한다면, 아이들과 부모를 탓해서 해결될 문제인가. 구조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합당한 해결책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건축물의 방음규정을 강화해 달라는 청원도 간간이 눈에 띈다 5 . 하지만 호응은 실로 미미한 수준이다. 동의자가 10명도 채 되지 않으니 말이다. 결국 압력은 개인을 비난하고 배제하는 쪽으로만 쏠린다.
국내 혐오표현 연구의 선구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혐오표현 문제를 다룬 저서 『말이 칼이 될 때』(2018)에서 노키즈존이 왜 혐오이고 차별인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떤 집단의 부정적인 모습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만들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 것은 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전형적인 행태다. (…) 한편, '노키즈존'은 아이/엄마에 대한 혐오를 실행에 옮긴 것이므로 그 자체로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 물론 아이와 엄마가 영업하는 입장에서 추가적인 부담이 될 수는 있다. (…) 그런데 이러한 부담이 아이 출입을 원천봉쇄할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문제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 특정 소수자 집단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식의 ‘손쉬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공존의 해법을 찾아보라는 주문이다.”
배제는 쉽고 공존은 어렵다. 나에게 오는 피해를 감수할 마음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이들을 이해하고 문제들을 함께 감당할 수는 없는지, 공존하기 위한 노력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배제를 택하지는 않기 바란다. 상생은 공동체를 함께 살아내는 이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여기에 있다
노키즈존은 무조건 잘못되었거나 반대해야 할 일이 아니다. 안전 문제 등 일부 사유가 노키즈존 지정의 합당한 근거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노키즈존을 ‘왜’ 원하는지 들여다보면, 주된 원인은 짙은 혐오다. 나에게 피해가 오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찍어 누를 수 있는 ‘만만한’ 약자의 위치가 겹쳐져 노키즈존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저출산 위기가 심각하다며 ‘출산을 해야 한다’는 말만 할 뿐, 낳은 엄마와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냉혹한 사회인가. ‘엄마 되기가 두렵다’는 이야기, 나아가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나오는 이유이다. 노키즈존이 적용된 공공장소뿐 아니라, 노키즈존 지정을 반기는 사회 전체가 아이와 엄마들에게는 가시방석이다. 엄마와 아이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사회에서 어떤 엄마가 주눅들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배제하는 것은 손쉬운 선택지이다. 조금이라도 거슬리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안 보이는 곳에 밀어버리면 나의 생활이 곧장 편해진다는 발상.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쉬운 선택지’임을 떠나, 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올바른 선택지’인가?
이것은 스스로에게 쓰는 글이기도 하다. 사실은 노키즈존을 지지하는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나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산만하게 굴면 거슬리고, 좁은 공간에서 울면 시끄럽다. 솔직히 짜증도 난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고 한다. 성인이고, 사회규범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자기통제능력이 형성된 나와, 모든 면에서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아이들의 기준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눈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조금 더 공존에 가까워진다.
그 ‘공존’이라는 답을 우선 결론에 놓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한다. 이곳이 배제라는 쉬운 선택지를 반기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귀찮고, 골칫거리인 사람들은 내 눈 밖으로 치워 버리고 만족하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힘들더라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먼저 고민하는 사회이기를, 모두의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있으니 말이다.
이운 (brisa_leve@naver.com)
- 「브라운 판결과 흑백 분리 폐지」, 석사학위논문(역사교육전공), 이은혜,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08, p.28 [본문으로]
-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여성혐오적, 성차별적 편견이 깔려 있는 시각이다. [본문으로]
- “아재 블랙컨슈머의 갑질”, 서울신문, 2016-10-05 [본문으로]
- “[시선]노키즈존 찬성자의 착각”, 경향신문, 2018-01-21 [본문으로]
- 2014년, 실제로 층간소음 문제 해결을 위해 건축물의 방음설계를 강화하는 방향의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14년 이후의 건축물에만 해당하므로 그전에 지어진 대부분의 주거공간은 방음설계가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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